존왕(尊王)을 명분으로 감행한 군사정변을 통해 성립된 메이지정권 최상위 권력집단은 군권을 장악한 메이지군벌이었다. 군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조선과 관련된 역사적 논의는 반드시 목적의식적이고 일관된 서술이 필요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주도하고 관변학자들이 부역한 군국주의적 역사관(식민사관)에 입각한 ‘식민사학’이 형성되었다.

식민사학 논리의 핵심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일제 침략이 아닌 한국사의 역사적 귀결이라고 바라보는 데 있었다. 바로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이 그것이다.

타율성론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주도한 만선사관(滿鮮史觀)으로 구체화되었다. 만선사관은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역사단위로 묶어 바라보는 것이다. 조선을 구성한 민족의 대부분은 만주 지방에서 연원하는데, 정체되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는 조선 역사는 늘 외부 자극에 의해 변화하였으며 그 자극은 대부분 대륙인 만주에서 연원한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에서 주장하는 타율성론의 다른 한 축은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369년에 아마토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562년까지 통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가야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정한론(征韓論)의 바탕이 되는 주장인데,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1882년 《임나고고(任那稿考)》 및 《임나명고(任那名考)》를 간행한 이후 퍼지기 시작하였다.

식민사학은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 기자로부터 시작하는 역사, 낙랑군 재평양설이라는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을 계승한 위에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여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완성하였다.

정체성론은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가 한국을 여행하고 쓴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1904)에서 주장하였다. 한국사는 일본과는 달리 서양과 같은 봉건제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10세기 정도 역사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식민지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선 역사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당파성론은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가 「한국정쟁지」(1907)에서 주장하였다. 조선 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이득과 권력 독점을 위해 당(黨)을 이루어 정쟁(政爭)을 일삼았으며, 지속적인 정쟁으로 조선 역사는 혼란스러워지고 백성들의 삶도 곤궁해졌다는 주장이다.

조선 역사를 타율성・정체성・당파성으로 설명하면서 근대화의 내적 동기는 부정되었고 당연히 외부 조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이런 논리는 식민사학자들이 식민사관으로 연구한 조선 역사에 근거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중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과 기자로부터 시작한 역사, 낙랑군 재평양설은 타율성론의 한 축으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본고에서는 식민사학의 여러 사안을 다 살펴보기 보다는 남인 실학자와 식민사학이 타율성론으로 연결되는 부분만 다루고자 한다.

*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론 계승과 ‘기자조선=중국 식민지’ 인식

대일항쟁기 식민사학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점은 단군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중국의 북부 지배, 일본의 남부 지배를 주장하였다. 중국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단군조선 부정과 더불어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인 기자로부터 서술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단군신화는 만들어진 신화이며 따라서 단군왕검은 허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단군왕검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부정한 일본인 학자는 나카 미치요(那珂通世)가 효시였다. (나카 미치요는 일본 동양사학 개척자이자 일본 고대사 연구가. ‘脫亞論’과 제국주의를 일본 근대화의 전형으로 제시한 메이지 시대의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하생이다.) 나카 미치요는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1894)에서 “단군의 이름을 왕검(王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명칭인 왕험(王險)의 험(險)자를 사람 인(人) 변(邊)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설은 불교가 동쪽으로 흘러들어 온 이후에 승려가 날조하여 나온 망탄(妄誕)”이라고 하였다. ‘지명인 왕험에서 왕검이란 이름을 꾸며내었다’고 기록한 정약용・한진서의 주장과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 터무니 없고 근거가 없는데 승려들의 기록이 정사에 기록되었다’는 안정복・한치윤의 주장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만주가 한반도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역사가 만주사의 일부라고 하여 만주사에 대한 종속을 강조하는 ‘만선사관’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 나카 미치요의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이다)는 「단군고(檀君考)」(1894)에서 단군은 조선의 조상이 아니라 고구려 한 나라의 조상으로 고구려에 불법이 흥륭(興隆)한 장수왕대 이후 단군 전설이 생겼다고 하였다. 단군이 강림했다는 태백산을 평안도에 있는 묘향산으로 비정한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들어, “단군전설은 승려의 허구로 태백산에 향목이 많이 나므로 이를 인도 마라야산에 비기고 그 향목을 우두전단(牛頭栴檀:단향목)의 종류로 보고 그 나무 아래 내려온 인연으로 단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며 “단군의 일은 모두 불설(佛說)의 우두전단에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남인 실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나카 미치요의 단상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그 창작연대 시기까지 구체화한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선도사서와 불교사서에 함께 기록되어 전하는 환웅사화를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였다.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 전래 기록이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다는 것이니 4세기 이후에야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웅사화의 내용이 서기전 2세기 무렵에 이미 전승되고 있었음은 실물 자료로도 확인된다. 부여문화권이던 요령성 평강(平崗) 지구(현 요령성 철령시 서풍현 평강진 일대)에서 ʻ금도금 청동 패식(牌飾)ʼ이 출토되었는데, 매로 상징되는 천손족 환웅이 순종하는 곰족과 버티는 범족을 두 날개로 포용하는 형상이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단군설화에 대하여」(1910)에서 “이미 정약용씨도 설명한 것처럼 ‘험(險)을 검(儉)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너무 심한 천착(穿鑿: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아니한 말을 함)’일 것이요...요컨대 지명의 왕험이 선인 이름의 왕검이 되었다.”고 하며, 고려 중기에 “단군이란 존칭을 붙여 단군왕검이라 하여 조선 창시의 신인(神人)이라고 한 것”이라고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였다.(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4년 용강현 점제현비를 발견하고 한사군 낙랑군의 古碑라고 주장하였다. 정인보, 손보기, 북한학계 등은 점제현비가 조작된 것이라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아동용 국사교과서인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 아동용》(1920)에 대한 교사용지도서에 해당하는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1922)에서 “단군 개국 전설은 고려 중기까지 아직 조선인들 사이에 행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그 다소라도 행하게 됨은 삼국유사 시대 이후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단군에 대한 공식적인 단안(斷案)을 내렸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뼈아픈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정사(正史)에 기재되었음으로써 단군은 기자에 앞서 조선 개국의 국조인 것처럼 간주됨이 많게 되었다. 그런데 이조 시대의 유명한 학자로 당시 전설이 망탄불계(妄誕不稽)하여 족히 믿지 못할 것임과 또 해당 전설이 승려의 손으로 날조된 것임을 논한 자가 적지 않으며, 최근 일본에 있는 학자의 연구 또한 다 동일한 결과를 보였다. 그래서 본서는 해당 전설을 취하지 않고 참고로 이곳에 덧붙여 적는다.

‘일본인 학자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명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동일하여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입장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천손의식에 바탕 한 ‘고대의 역사경험’을 기록하고 전달한 고기류(古記類)를 불신하고 그 내용을 대부분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던 결과물인 것이다. 남인 실학자들의 단군왕검에 대한 인식을 조선총독부가 고스란히 계승한 결과는 한국 상고・고대사의 철저한 왜곡이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론을 계승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인’ 기자와 위만에 주목하여 한국사를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하는 역사로 변개하였다.

단군의 일을 승려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일로 본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삼국 이전의 한반도는 “기자의 조선과 위씨의 조선이 있었고 마침내 중국 한나라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이라고 칭하기보다는 중국 한나라 땅의 일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역시 단군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전국시대 이래 중국 이주민이 세운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거의 독립된 국가였으나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보았다. 조선반도 거주민들은 스스로 국가를 만들 능력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했고, 한족 이주민이 이주한 뒤 국가 건설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만주철도조사부 역사조사부에서 시라토리 구라키치 지도하에 조선 및 만주 지역 연구에 종사하였다.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모두 조작・전설이며 그 속에 역사적 진실은 없다고 단정하지만, 《일본서기》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수없이 조작되어 있지만 그 속에 역사적 진실도 담겨있다는 교묘한 주장을 하였다. 이른바 신공황후의 신라정벌[親征]은 사실이 아니지만 일본 장군의 신라정벌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특이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인식과 동일하게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도 한국고대사가 기자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기자조선은 한족(漢族)이 세운 식민지였고,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을 이은 신(新)식민지였으며,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교섭과 전쟁은 식민지와 식민 모국(母國) 사이의 교섭・전쟁으로 인식하였다. (이바나 이와키치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으로 《조선사》 편찬의 실무책임자였다. 「진장성동단과 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를 써서 낙랑군 遂城縣을 황해도 遂安이라면서 만리장성이 수안까지 왔다고 주장했다. 이덕일은 고려사》를 인용하여 황해도의 遂安이란 지명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1천여 년이 지난 고려 때 생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이나바 이와키치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라고 쓴 내용은 《한서》 「지리지」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한 논리로서 ‘조선은 고대로부터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지배를, 남부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는데, 단군을 지움으로써 보다 중요한 그 하나가 완성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완성된 식민사학 총결산이라고 할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제1편 제3권(지나사료(支那史料))에서도 고조선 항목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등 기자 관련 부분을 게재하여, 조선사편수회 기준에서 고조선을 기자조선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을 부정하자 한국고대사는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변개되었고 결국,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한민족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한사군은 당연히 중국 식민지였다. 식민사학자들 관점에 의해 한국고대사는 출발부터 중국인의 식민지로 시작하게 되었고, 고구려 건국 전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을 중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역사로 창작되었다.

남인실학자들과 식민사학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단군왕검을 부정하고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을 저열하게 보았으나 남인실학자들은 중화 문명 전수자로서의 기자를 보았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학은 오로지 식민지를 개척한 중국인 기자를 보았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볼 때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 즉, 사관(史觀)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남인실학자들이 단군을 폄훼하고 부정하자 이를 고스란히 계승한 식민사학은 거기에 더해 식민지로부터 시작한 한국사를 ‘조작’했다. 남인실학자들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겠으나 우리 상고・고대사를 유교사학 중에서도 가장 퇴행적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상고・고대사가 식민사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식민지에서 시작한 역사로 변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