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에서는 낙랑군은 처음 설치된 위치에 계속 존속하였으며, 한(漢)이 멸망하고 진(晉)이 들어선 이후에도 유지되었다고 한다. 낙랑군의 관할 범위는 대체로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일부 지역이라고 하였다.

낙랑군 위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 삼국사기 기사 주석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낙랑군 위치를 현재 중국 요령성 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으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이 현재 북한 평양이라는 주장은 북한학계의 주류 견해인데, 당시는 북한 평양지역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낙랑군은 한무제 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여 313년까지 존속한 중국 왕조의 변군(邊郡)으로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하며, 군치(郡治)는 고조선 수도 왕검성에 설치한 조선현(지금의 평양)이라고 한다. 미천왕이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때 낙랑군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삼국사기』기록에는 313년 ʻ한반도 서북부지역에 있던 낙랑군이 소멸되었다ʼ는 표현은 없다. 낙랑군을 침략하고 포로를 노획하였다는 표현만 존재한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悢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삼국사기』)

중학・고등교과서에서는 모두 고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예외 없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본문에 서술은 하지 않았으나 지도에 명시(明示)하고 있다. 고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을 위만이 쫒아내고 고조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준왕을 쫒아낸 위만의 왕검성은 평양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한사군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인식을 지도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한국고대사 중심무대가 지금의 평양 일대라는 인식을 지도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남인 실학자들은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였던 평양(한사군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으로 고착화시키기 위해 지리비정을 하였다.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보았던 당대의 새로운 흐름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북쪽으로 보느냐 남쪽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대동강 일대의 평양을 낙랑군으로 보아 남인 실학자들의 인식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낙랑군 위치 문제에 대해서는 국편은 물론 중학・고등교과서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같은 의견이다.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인식을 아주 ‘충실히’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류 강단사학에서도 한사군에 대한 역사지리 연구는 ‘조선 실학자일제 식민사학주류 강단사학’의 계승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한영우는 ʻ이병도의 한사군 연구에 대한 학설은 우리 학계의 통설ʼ이라고 하였고, 오영찬은 ʻ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한사군에 대한 연구 성과와 방법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연구과 이병도의 연구에 수렴됨으로써 한국 고대사 체계의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ʼ고 한다. 송호정도 ʻ이병도의 고조선 및 한사군, 삼한과 관련된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은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컸는데, 이는 한백겸과 안정복, 특히 정약용 같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많이 고민하였던 내용을 바탕으로 수행되었다.ʼ고 하였다.

문제는 송호정처럼 이병도를 포함한 일본인 학자들의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를 “근대 사학에서 요구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그저 객관적이고 합리주의적 서술만을 추구하여 근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 속에서 수행되었다”고 평가하는데 있다. 남인 실학자들의 주관적・비합리적인 ‘연구 방법과 연구 성과’를 계승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립(定立)한 식민사관을 ’객관적・합리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015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학습요소(학생들이 배워야 할 학습내용)는 ‘고조선의 건국과 변화’이다. 중학교 역사 ‘집필기준’ 고대사 부분에서 요구하는 내용은 ‘동아시아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고려하며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을 설명한다’이다. 그 이상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음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서술된 중학・고등교과서는 주류 강단사학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관점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으로 이어지는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과 낙랑군 재평양설 인식의 대체가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국편의 관점, 중학・고등교과서 서술 내용을 통해 살펴보았다.

주류 강단사학은 단군왕검에 대해 단군조선을 건국한 ‘사람’이지만 ‘관념적인 존재’라고 이해할 수 없도록 서술을 하고 단군조선도 2000여 년 이상을 공백으로 비워두어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단군조선의 역사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역사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위만의 반란으로 쫓겨 난 준왕을 ‘고조선 왕’이라 하여 서쪽 번조선 왕이 아닌 단군조선 왕으로 오인되게 하고 있으나 단군 후손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유교사학・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는 않으나 결별하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입장이다.

신채호나 정인보 등 대종교사학자(민족사학자)들이 강하게 비판했던 낙랑군 ‘재평양설’ 중심의 한사군 연구는 이병도 학설이 주류 강단사학 통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극복되지 못하였다. “한사군의 역사지리에 대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방법론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나카 미치요(那珂通世),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연구와 이병도의 연구에 수렴됨으로써, 한국고대사 체계의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주류 강단사학에서는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이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