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사서인 《요정징심록연의》 「부도지」에 의하면, 선도문화(천손문화・밝문화)는 배달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사해에 전파되어 세계 각처에서 지역화되었다. 단군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물질(현상) 차원에 몰두하면서 수행에 기반한 선도의 위상은 약화되었고 단군조선의 위상 또한 흔들리게 되었다. 단군조선 말이 되면서 물질(현상) 차원에 몰두하는 중원 문화가 단군조선으로 역유입되어 선도사상을 더욱 약화시켜갔다.

배달국・단군조선에 인접해있던 중원지역으로 전파된 선도문화는 음양오행론에 기반한 도교문화 및 유교문화로 변이되었다. 유교문화에서는 배달국에서 비롯한 문화 전승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고 중국 문화 기원을 ‘삼황오제(三皇五帝)’로 설정하였으며, ‘삼원오행론(기・화・수・토・천부론)’을 대신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음양오행론’을 제시하였다. 오행의 중심에 조화점인 일기(삼기:천부) 대신에 통제점(統制點)인 토(土)를 놓고 제왕의 도를 주창하였한 것이다.

황제(黃帝)는 치우천왕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중원지역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황제가 갖는 이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요(堯)는 土를 중심자리로 밀어 넣고 외곽에 목・화・금・수를 배치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중원식 오행론, 중원식 천자제후제를 고안했다. ʻ기・화・수・토・천부론ʼ에 기반한 배달국의 천자제후제에 의할 때 토덕(土德)의 황제는 천왕의 제후에 불과하지만, ʻ목・화・토・금・수론ʼ에 기반한 중원의 천자제후제에 의할 때 토덕의 황제는 천왕의 지위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생하는 ‘홍익주의’ 대신 세계를 ‘지배・통제’의 대상으로 놓고 다스리는 패권주의인 ‘중화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사람 안의 밝음・생명(氣)・양심을 살리고 사회 또한 밝게 만드는 조화・평화・공생의 홍익주의 대신 폭력을 동원한 지배・통제 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세계를 분리된 개체들의 갈등・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는 물질세계의 속성은 ‘분리・대립’인데, 본질의 속성인 ‘조화로움’은 없애고 ‘분리・대립’하는 현상에만 매몰되어 다스리려고 한다면, ‘지배・통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여기에는 폭력이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원오행론의 ‘조화로움’을 음양오행론의 ‘지배・통제’로 바꾸어 버린 중원지역에서 자신들이 지배와 통제 대상이 되는 외부(外部)를 자처할 리는 만무(萬無)하였다. 주(周)대에 사이(四夷)라는 명칭이 나타났으며, 춘추전국시대에는 동이・서융・남만・북적(東夷・西戎・南蠻・北狄)이라는 명칭이 정해졌다. 중원지역에서, ‘통제점인 내부로서 외부를 제어한다(以內制外)’는 생각이 사상으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중원지역에서 발생한 유교에서 중원지역은 중화(中華), 여타 지역은 오랑캐라는 정치이데올로기를 만들고, ‘화이론(華夷論)’적 역사인식인 ‘중화사관(中華史觀)’이 정립(定立)되었던 것은 사세 상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통하여 역사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대의명분에 의해 시비・선악 등을 분별하여 비판하고, 왕도사상과 정통의식을 바탕으로 한 대의를 표명하였다. 왕도사상은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중국의 유가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단, 현실에서 실현된다 하더라도 중화(中華)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주변국이 독립적인 주체성을 내세워 중화에 왕화(王化:임금의 덕행으로 감화하게 함)되지 않겠다면, 인과 덕은 언제라도 폭력적인 침략으로 돌변하였기 때문이다.

《춘추》에 나타난 비판정신은 인심을 바르게 하고 기강을 확립하여 왕도정치 이상을 실현하는 것, 즉 존주론(尊周論)과 존왕론(尊王論)으로 쓰러져 가는 주 왕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주왕실이 요순의 왕도 정통을 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예악을 중화문화 정수로 인식했던 공자는 "이적에 왕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제하에 왕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하여 중화문화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화이론적 인식을 보여주었다. 지역과 종족이 문화와 함께 화와 이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유가(儒家) 사상이 국가 통치 철학으로 자리를 잡은 한(漢)나라 시기에 이르러 체계화된 중화사상은, 12세기 금・송(金・宋)의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체험한 주희 시기에 오면서 지역적・종족적 층위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종족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양이사상(攘夷思想)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다. 주희의 화이론은 중국을 내로, 이적을 외로 인식한 춘추 논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다만, 공자의 춘추학적 화이사상을 보편적인 이치(理致)로 확장한 차이가 있다. 즉, 중화와 이적은 결코 대등할 수 없고 상하질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 간의 규범이자 보편적인 이치로서 중화 질서는 항구 불변한 천리(天理)라고까지 보았던 것이다.

화이사상으로 불리기도 하는 중화주의는 중국 한(漢)족이 자국과 자민족 문화를 최고 지위와 절대적 기준에 올려놓는 문명관이자, 스스로를 주변 국가들과 구분하는 세계관이며 국제질서관이다. 또한 중화주의는 중국・중앙(의 문화)을 보편 문명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다. 한족 중심 문화를 문명(文明;華)으로 인식하고 주변 비(非)한족문화를 야만(野蠻; 夷)으로 인식한다.

무엇보다도 중화주의적 역사 인식에서는 지리적・종족적 중화가 항상 중심에 놓였다. 따라서 주변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필요에 따라서는 지배 대상으로 여겨 폭력을 동원한 소유와 지배・통제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리 높여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주창하다가도 중화(中華)라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상대방 문화와 정신을 무참히 짓밟곤 했다. 남송처럼 힘이 없을 경우에는 정신적인 대의명분에 그쳤지만, 힘이 있을 경우에는 고수(高隋)전쟁・고당(高唐)전쟁처럼 전쟁도 불사하였다. 21세기에 들어 중국이 보여주는 패권주의적인 모습 역시 중화주의적 역사 인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지만 배타・지배・통제를 속성으로 하는 중화주의에 기반한 중화사관과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에 기반한 홍익사관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확연히 달랐다.

유교 중화사관은 가치판단 기준이 유교경전이다. 유학자들은 신이(神異)한 내용을 담은 신화나 전설은 근거가 없고 허황되며 상도(常道)에 어긋난다(荒誕不經)고 보았기 때문에 배척했다. 따라서 ‘천손의식에 바탕한 고대의 역사경험’을 기록하고 전달한 선도사서 계통 고기류(古記類)를 불신하여 그 내용을 대부분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유학자들이 유교 중화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서술할 경우 선도사서의 상고・고대사 기록을 왜곡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닌 반드시 도달하는 방향이었다. 다음에서는 유교 중화사관에 의한 상고・고대사 왜곡과 그 왜곡의 심화과정을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