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사학은 지나간 사건의 선악과 시비(是非)를 포폄(褒貶)하여 현재의 교훈을 삼으려는데 목적을 두고 역사서술을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교훈(敎訓)사학이며,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포폄의 가치기준은 왕도사상과 강상(綱常)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유교경전이다. 강상은 유교의 기본 덕목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한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오상은 사람이 항상 행(行)하여야 하는 5가지 바른 행실, 곧 인・의・예・지・신(仁・儀・禮・智・信)이다.

유학자들은 중화주의라는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는 고대 역사경험은 황탄불경(荒誕不經)하다고 배척하였다. 공자가 편찬한 《상서(尙書)》에서는 중국 역사가 요순에서 시작된다. 신시배달국은 중국의 요순보다 1500년 앞선 시기에서 시작하는 역사이니, 유교사서에서 신시배달국 기록을 삭제한 것은 중화주의 유학자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유교문화와 중국식 예론(禮論)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던 시기에 관해서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모화적인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재단하여 서술하였다. 선도사서인 고기류에 기록된 ‘고대의 역사경험’을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 중화주의 유교사서 서술의 기본방향은 당연히 상고・고대사에 대한 왜곡으로 귀결되었다.

수서. [사진 출처=Japan search]
수서. [사진 출처=Japan search]

유교사학이 중화사관이라는 틀 속에 우리 역사를 최초로 집어넣은 사건은,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표현했던 고려중기 서경천도운동(1135)과 그 실패 과정에서 드러난 선도(仙道:선불습합) 세력과 유교 세력의 대충돌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이루어졌다.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교 세력은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정치 표방을 합리화하고 유교사관 확립을 도모하였다. 한국사를 유교사관으로 해석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역사기록에서 배제하고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서술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인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하였다. 유교사관으로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유교세력이 장악한 정치권력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사관으로 조선 역사를 다시 쓴 것도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문화 입장에 입각하여 고대 사서를 편찬하면서 유교사관에 배치되는 고대문화 요소를 전부 삭제하고 단군조선사조차도 취급하지 않았다.

북벌을 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자고 주창한 서경천도세력의 입론(立論)을 없애 사대의 대척점에 선 자주・독립 역사인식의 싹을 제거하려 하였던 유교 세력에게 한국고대사 중심무대였던 고대 평양이 만주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부식은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였던 고대 평양을 최초로 오직 패수(浿水)라는 이름에만 근거하여,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김부식은 한나라 낙랑군이었던 평양성 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된 《신당서(新唐書)》 패수(浿水)와 《수서(隋書)》 ‘수양제 고구려원정 조서’에 등장하는 패강(浿江)이 신라 서북에 있던 패강(浿江=대동강)과 같은 것이라고 자의적(恣意的)으로 단정하고, 따라서 대동강(大同江=浿江) 북쪽에 있는 지금의 평양을 한사군 낙랑군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김부식이 인용한 《수서》 구절 바로 앞에는 수양제 113만 대군의 24도(道:공격로)가 명시되어 있다. 수나라 대군은 한나라 낙랑군에 속하는 현이었던 ʻ조선, 함자, 점제, 대방, 해명, 장잠, 누방, 제해, 혼미, 동이ʽ도를 포함, 24개 공격로를 통해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조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낙랑군을 지나고 나서 평양으로 집결하라는 것이므로 그 평양이 이미 지나온 낙랑군일 수는 없으며, 당연히 한반도 평양이 그 낙랑군일 수도 없었다. 수양제의 조서는 낙랑군이 요서나 요동지역에 있었기에 가능한 명령이었다.

《수서》 ‘수양제 고구려원정 조서’에는 수양제의 1차 침략 당시인 영양왕 23년(612)에 고구려는 이미 사기 화식열전에서 연나라 강역으로 기록된 발해와 갈석산이 있던 요서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년 후인 대업 10년(614년) 3차 고구려정벌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지난해 군대를 출동시켜 요수와 갈석산에 가서 죄를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서》와 《구당서》 「배구열전」에는 한군현은 고죽국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고, 고죽국 지역은 수나라 시기에는 고구려 영토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의 위치를 요서지역 난하 하류에 비정하고 있다. 《주서》에서도 고구려 서쪽 강역이 요수를 건너고 동서가 2000리(里)라고 하였다.

나머지 14개의 공격로도 요동, 현도, 부여, 후성, 양평, 갈석 등 대부분 요서나 요동에 있는 지명들이다. 24도 중에는 임둔도(臨屯道: 右 제4軍)와 동이도(東暆道: 右 제10軍)가 보인다. 임둔과 동이는 요동이나 요서에 있되 같은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국통감》 이래 많은 조선 유학자들은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군의 치소가 동이현인데 지금의 강릉이라고 보아 왔다. 김부식이 인용한 《수서》의 ʻ수양제 고구려원정 조서ʼ 기록은 조선 유학자들의 한사군 지리비정 오류를 바로잡는 중요한 사료이다.

강역(疆域)에 대한 기록은, 상대 국가에게 유리하게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경계를 접한 국가들의 사료가 제일 신빙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다른 기록도 아닌 국가의 운명을 걸고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인 수나라 황제 양광의 조서이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들이 믿고 따르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부식이지만 중화주의 유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자신의 신념에 부합(符合)하는 사료만 인용하여, 고대 요동지역에 있었던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자의적으로 주장하였다. 한국고대사 중심무대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중화사관이라는 기준으로 한민족 상고・고대문화를 인식하고 서술하면서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 제천행사, 단군왕검의 치적, 홍익실천 기록들이 유교사서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기왕에 편찬되었던 선도사서들은 불태워지거나 수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고려의 입국이념(불교와 습합된 선도)에 입각하여 예종 원년(1106) 왕명으로 편찬되었던 해동비록은 그 이후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선도사서들은 민간에서 자유롭게 유통될 수 없었고 보관을 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세조~성종까지 3대에 걸쳐 관청・민가・사찰에 있는 선도 관련 서책들은 ‘사처(私處)에 보관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모두 수거 대상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자진하여 바치면 포상을 하거나 품계를 높여주고, 책을 숨긴 사실을 고발해도 포상을 하면서 수거를 독려하였고, 숨기다가 들킨 자는 참형에 처했다. 유교의 나라에서 선도사서들은 바위에 구멍을 파고 보관하여 겨우 후세에 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도사학은 조선사회에서 저류(底流)화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유교사학이 고착화될수록 선도사학은 저류화되었다.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조선을 개창한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지배체제 정당화와 통치 이념 수립에 목표를 두고 사서(史書)를 편찬하였다. 15세기에는 중화주의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가 체계화되었다. 관찬사서 《동국통감》(1485)이 대표적이다. 중화주의 유교사관을 더욱 강렬하게 주장하던 15세기 《동국통감》은 사대적이라고 비판받는 《삼국사기》보다 더 철저하게 사대주의 중화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사서였다.

조선은 내정과 외교를 모두 자주적으로 하고 명나라의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정하는 경위에서 보이듯이 중국 왕(주무왕(周武王))의 봉함을 받은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이며, 조선의 정치와 교화와 풍속을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기자조선 후계자임을 천명하였다.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이 중국의 명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명호를 받은 것에서 무슨 취할 게 있겠느냐’는 조선 창건 주도세력, 정도전의 시각을 염두에 둔다면 유교 건국세력의 사대(事大)는 외교의 일환이라기보다는 건국이념으로 보인다. 더욱이 세종이 태종의 무덤 개석(蓋石)에 새긴 ‘명나라의 제후국인 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는 문구를 보면, 사대를 정체성으로 한 조선이 선명하게 읽힌다.

그러나 창업(創業)의 최초 원인이 사대주의를 표방한 위화도 회군으로 북벌론자 최영을 죽이고 고려 왕통을 빼앗아 창업하였으므로 조선 건국의 정통성은 사대주의가 담보하게 되었다. 중화・사대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 역사인식, 즉 중화사관으로 우리 역사(國史)를 보니 중국문화를 이 땅에 전수한 것으로 전해지는 기자가 주목되었다. 기자는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그를 통해 비로소 소중화(小中華)로 편입되고 나아가 그를 통해 중화를 더욱 사대하게 만드는 매개체였다. 기자가 주목되자 사대관계가 존중되었으며, 사대관계가 형성된 이후의 강역을 실지(失地:만주)보다 더 중시하는 ‘새로운’ 국사 인식이 성립되었다.

15세기 관찬사서 내용이 방대하고 상세하여 사람들에게 읽히기 어려운 점이 있어 16세기에는 읽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략형(史略型) 역사 편찬이 개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는 새로운 연구가 진척된 것은 없고 오직 사료의 취사선택과 편찬체제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16세기에는 사적소유에 바탕을 둔 지주제가 발달하면서 지배층의 국가권력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지주ㆍ전호제를 배경으로 성장한 사림은 절의(節義)라는 가치를 내세워 훈구파에 맞섰는데 그 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풍의 도학(주자학) 공부가 요구되었다. 사림의 도학숭상은 그 도학 발상지인 중국사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사림에게 국사는 고유한 혈통과 고유한 문화를 가진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 역사라기보다도 중국에서 발원한 도학이 동국(東國)에서 전개된 역사인 것이었다. 즉, 사림은 한국사와 중국사를 개별 민족 역사가 아닌 똑같은 유교문화권 속에서의 소중화와 대중화로서 인식하였다. 대중화와 소중화는 단지 지리적 차이와 군신적 사대관계의 차이일 뿐이었다.

사림에 의해 성리학적 보편주의가 확대되고, 기자가 본격적으로 탐구되면서 기자를 통한 중화주의가 확대되었다. 존화(尊華) 사대의식은 강화되었고 중국 문명을 전파하여 동국(東國)을 소중화로 만들었다는 기자에 대한 존숭 또한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