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선도사학)에 대한 ʻ국수·영토주의ʼ라는 마타도어
민족사학(선도사학)에 대한 ʻ국수·영토주의ʼ라는 마타도어
  •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 k-spirit@naver.com
  • 승인 2022-08-0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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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6)

선도사학은 대종교와 함께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는데, 뜻밖에도 대종교와의 관련성이, 독립투쟁을 한 민족사학자(대종교사학자)들을 ‘제국주의적 경향을 지닌 국수주의자’라고 폄훼하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매도하는 인식은 손진태로부터 비롯되었다.

한영우에 의하면, 손진태는 ‘바로 이러한 (청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의) 구(舊)민족주의는 애국적・군국주의적・제국주의적’인 것인데 그 바탕에는 센티멘탈리즘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 보았고, 그의 신민족주의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민족주의를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식민지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의 침략적 민족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고 ‘국수주의’라고 비판하는 논리의 ‘뿌리’는 손진태에서 비롯한 것이다.

손진태는 광복 후 신민족주의사학을 주창하면서 안재홍과 함께 신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민족주의라면 민족주의의 한계가 극복되면서 변화 혹은 발전한 양태일 것이다. 그러나 손진태는 일제강점기에 단 한 번도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비난하는 입장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민족보다 우선시하는 사상은 ‘민족 반역적 사상’이라는 반(反)민주주의 견해를 표명하였고, 문교부 차관으로 좌익 교원 퇴출과 학도호국단 창설 같은 반민주주의 교육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좌우합작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신민족주의자로 평가되는 손진태는 실상은 민주주의, 민족주의, 좌우합작 등 모든 면에서 ‘신민족주의’를 설파한 안재홍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한편, 손진태의 영향을 받은 한영우는 《韓國民族主義歷史學》(1994)에서 다음과 같이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① 신채호가 부여족을 민족의 주류로 부각시킨 것은...유교사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며, 보다 더 실천적으로는 만주 수복의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팽창적 민족주의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② 이상룡이 만주족을 우리 민족으로 간주하면서 만주 중심의 역사를 국사의 주류로 부각시킨 것은, 김교헌・박은식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을 포섭하면서 그곳에 대조선국을 건설하려는 실천목표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③ 신채호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한민족이 만주 쟁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④ 그(박은식)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은 철저한 팽창주의요 무력주의이며 반귀족적 평등주의이다.

⑤ 만주 혹은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를 본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로 설정하고, 나아가 만주 자체를 점차적으로 영토화하려는 원대한 계획까지도 설계하고 있었다.

⑥ 1910~1920년대의 민족주의가 만주 수복을 실천목표로 하여 다분히 팽창주의적・제국주의적 경향까지 띠었던 데 이유가 있었다.

⑦ 한말~일제초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의해 믿받침되어 있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표리관계에 있었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자기 나라에서 독립투쟁을 못하여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팽창적 민족주의’로 ‘만주를 수복’하고 ‘영토화’하여 ‘대조선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1910년대의 민족사학자이자 독립투사들은 순식간에, 현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낭만적이면서도 무모한 ‘영토주의자’, ‘팽창주의자’로 전락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생존 차원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자의적으로 ‘제국주의적 경향’이라 하여 조선을 침략하여 강제 합병한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취급을 하고, 이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표리관계에 있다고까지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족주의자 비판이 어떻게 대종교와 관련이 되는지 《韓國民族主義歷史學》를 다시 살펴보자.

대종교는 본래 독립협회(獨立協會) 혹은 구국계몽운동(救國啓蒙運動)에 참여했던 호남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나아가 만주를 수복하여 대조선국(大朝鮮國)을 건설할 목적으로 창설된 종교로서,......대종교는 그 교리 자체 속에 독특한 역사인식체계를 담고 있는데, 이 역시 예부터 전해내려 온 신교적(神敎的) 역사인식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대종교는 이렇듯 극단적이고 팽창적인 민족주의운동을 위한 목적에서 중광(重光)된 민족종교이기 때문에 만주를 무대로 하여 무장투쟁과 식민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지사들은 거의 대부분 대종교의 신도가 되었다.

대종교가 ‘팽창적인 민족주의운동’을 위한 종교단체이므로 그 신도들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라고 재단하고 위와 같이 민족사학자이자 독립투사인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이상룡 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종교를 팽창적 민족주의운동이라고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종교가 만주수복(滿洲收復)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것은 ① 발해(渤海)를 가장 숭상하여, 《삼일신고(三一 誥)》와 같은 경전(經典)을 발해 고왕(高王)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었다고 믿으며, ② 현생인류는 백두산에 출현한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의 자손으로서 이들이 구족(九族=九夷)이 되었는데, 이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중심무대라고 보며, ③ 한일합방 후에는 만주를 포교(布敎)의 중심지로 삼아 총본사(總本司)를 만주의 청파호에 두었으며(1914), ④ 고구려와 발해의 구강인(舊疆人)에게는 입교(入敎)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전(特典)을 부여하고, ⑤ 1923년(?)에 대종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피소(被訴)되었을 때, 그 소문(訴文)에 대종교는 만주를 탈환하여 대조선국의 건설을 계획하였다고 한 점 등을 들 수가 있다.(《韓國民族主義歷史學》)

① 발해를 숭상하여 《삼일신고》를 대야발이 지었다고 믿거나 ②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중심 무대로 보는 것이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아무런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다. ③ 총본사를 만주로 옮긴 것은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시・학대・불법 체포・고문・사형’ 등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교세를 확장하고, 항일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④ 만주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하는 것을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이다. 포교를 하여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지구상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라면 가지고 있는 기본 특징이다. ⑤ 대일항쟁기 독립투쟁의 중심이 되었던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 검찰 기소문 내용을, 그것도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대종교가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근거로 드는 것도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사학자들은 편협한 국수주의자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신채호는 영토와 국권(國權)을 확장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민족주의, 즉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을 뿐이다. 신채호는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나 조선인 이주지로 생각했을지언정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만주를 고토회복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신채호의 고대사에 대한 저술에서도 만주수복론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신채호를 주목한다면, 그의 민족주의 사상은 국수적인 자강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인류공동의 국제주의적 세계관 속으로 민족의식을 흡수하여 열려진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도 역사학계에서 계속되는, 민족사학을 국수주의로 매도하는 비난은, 민족사학의 원형인 선도사학이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사관’에 기반하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힘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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