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이후, 3저호황(저달러・저금리・저유가) 시기에 ‘생존’과 관련된 경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한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었고, 동양 사상과 명상법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급속한 서구화에 대한 반성적 시대분위기 하에서 고유의 선도수련 전통도 주목되었다. 여러 선도수련단체가 등장하면서 선도수련문화가 대중화되었다.

1980년대 이후의 선도수련문화는 선도수련을 통한 자성(自性) 개발을 중심으로 하였던 점에서 선도의 ‘성통’ 요건에 충실한 방식이었다. 선도가 변질된 민속・무속 형태, 또 근대 이후의 민족종교 형태에서 벗어나 수련법을 중심으로 하였으니 선도의 성통적 본령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선도수련문화가 확산되면서 선도의 사회적 실천도 발현되었는데, 개천절・광복절 행사, 단군상 보급 등을 통해 홍익인간・재세이화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1990년대 단학의 홍익문화운동이 그것이다.

선도수련의 대중화와 궤를 같이하여 선도사학 연구도 진전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중들에게 소개된 선도사서와 중국 동북지역 상고문화의 등장, 중국의 역사강역 밖에서 발견된 상고문화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동북공정은 한국 역사학계 일각에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1986년 임승국의 주해본 《환단고기》 발간은 선도사학 연구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 권으로 묶여서 소개된 선도사서에는 한민족의 철학과 사상을 담은 〈천부경〉과 〈삼일신고〉 전문이 실려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연구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저술연대, 용어사용, 교리체계, 서술 논리상의 모순 등으로 위서 시비에 걸려 있었으나, 상고・고대의 역사 뿐만 아니라,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어 한국선도 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1986년 김은수가 변역・해설하여 소개한 선도사서 《부도지》 역시 선도사상을 연구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 《부도지》는 한국선도의 존재론적 인식(기・화・수・토・천부(氣・火・水・土・天符))과 고유의 역사 인식(복본(復本))을 연동하여 보여주는데, 구체적인 역사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방식 대신 복본을 기준으로 전기가 될만한 사건만 선별, 사평을 붙이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 초 중국 역사 강역과는 전연 무관한 만리장성 밖 우하량유적에서 편년이 서기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제단(壇), 여신묘(廟), 적석총(塚)유적 및 총에서 출토된 옥기(玉器)’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요서지역 우하량유적을 대표로 하는 홍산문화가 알려진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한국학자들은 홍산문화의 성격을 단군조선 선행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단・묘・총 및 옥기’로 대표되는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이후 선도사학 원형회복을 위한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중국의 동북공정은 선도사학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중국의 역사 강역과 무관한 한민족 선조들의 역사적 활동 공간에서 발견된 홍산문화를 배타적 중국문화로 독점하고 동북 3성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과 역사를 중국 민족과 역사에 편입시키는 역사공정은 한국학계 일각에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홍산문화는 시기나 내용 면에서 환웅사화에 등장하는 환웅 배달국의 선도제천문화 기록과 부합하였기에 한국학계 일각에서는 홍산문화를 단군조선 선행문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하였다. 선도사학으로 나아가는 방향이었다. 중국 고고학자 소병기는 홍산문화 시기에 고국(古國)단계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중국 문헌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당연히 그 국가에 해당하는 이름도 없다. 홍산문화 시기의 고국은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倍達國)으로 《삼국유사》에는 신시(神市)라고 기록되었다.

한창균은 많은 성(城)과 호구(濠溝:해자)가 활발하게 축조되고, 청동주조기술이 나타나기 시작한 하가점 하층문화기(BCE 2500년~BCE 1500년) 초기에 단군왕검의 조선(朝鮮)이 건국되었는데, 서로 계승관계에 놓여 있는 홍산문화(BCE 4000년~BCE 2500년) 시기를 환웅의 신시(神市)라고 보았다. 또한, 하가점하층문화인, 비파형동검을 내놓는 하가점상층문화인, 현대 한국인 사이에 보이는 체질인류학상 특징이 서로 닮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여 홍산문화 주체 세력이 현대 한국인의 조상임을 명확히 했다.

윤내현은 후기 신석기~동석병용기(銅石竝用期)인 홍산문화에 인류학 사회발전 단계론을 적용한 후 환웅사화와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고고학 단계와 인류학 단계를 일치시킨 위에 다시 환웅사화 내용(환인시대・환웅시대・환웅+곰녀시대・단군시대)을 결합시킨 것이다. 윤내현은 후기 신석기시대인 홍산문화 중기는 ‘고을나라(마을연맹체 사회) 단계’로 환웅사화의 ‘환웅+곰녀시대(서기전 4000년 이후)’에 해당한다고 보았고, 서기전 2500년 이후 단군왕검이 건국한 조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환웅사화의 내용과 연관지어 설명하면서도 그 고을나라가 ‘신시’였음을 명시하지는 못하였다.

윤내현은 《고조선연구》를 통해 단군조선의 건국과 한민족형성, 단군조선의 강역과 국경, 연대와 중심지, 국가구조와 정치・경제・사회・풍속・문화・과학・대외관계 등 단군조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규명하였다. 그런데 한민족이 고조선 때 형성되었다는 윤내현의 견해는 환웅의 배달국에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선도사학의 인식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 문헌고증과 사료비판을 통해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낙랑군이 모두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한사군 ‘재요서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윤내현의 연구에 반박이나 비판이 전혀 없다는 것은 한사군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론적으로는 마무리되었음을 뜻한다. 이제는 좀 더 정교한 지리비정과 고고학 방면으로 확인하는 절차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은 윤내현, 최재석의 연구 성과에 더해 북한학계의 연구 결과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면서 주류 강단사학으로 이어진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조목조목 비판하여, 대종교사학자(선도사학자)인 신채호, 정인보의 뒤를 이었다. 또한 중화사관을 만든 공자를 이어 중화사관으로 화하족 역사를 창조한 사마천의 《사기》가 다룬 중국 역사의 시원(始原)이 실상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에서 개척한 역사였음을 삼가주석(三家注釋) 연구를 통해 밝혀내기도 하였다.

복기대는 홍산문화가 단군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홍산문화 특징 가운데 하나인 돌담 축조 방식이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산성, 석성 축조 방식으로 계승되었다고 하였다. 짧은 다리가 바깥으로 뻗친 세발 질그릇과 옥기의 형태・표현 소재・제작 기술의 공통점 또한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의 계승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박선희는 복식사를 연구하여 홍산문화가 단군조선 선행문화임을 주장하였다. 고조선시기 이후 한민족의 고유한 복식으로 자리잡은 변(弁)이나 절풍(折風)과 같은 모자는 홍산문화 시기 제의를 거행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옥고(玉箍)와 절풍모양 옥장식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홍산문화 관모의 전통과 함께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로 이어지는 청동장식단추는 한반도와 만주지역 대부분의 단군조선 묘장에서 나타나는 단군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용하는 환웅사화에 나타나는 환웅족・웅족・호족을 한족・맥족・예족으로 바라보았다.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한(밝)족은 태양에서 연유하는 밝음・하늘을 숭상하고, 새를 토템으로 애호하고 스스로를 천손으로 인식하였다고 한다. 신용하는 한반도에서 이주하여 홍산문화를 주도한 맥족이 서기전 3000년경 기후변동으로 남방으로 이동하여 고조선 건국에 왕비를 배출하는 부족으로 참가하여 고조선문화와 고조선문명 일부로 통합 발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심백강은 중국 문헌과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혔다. 홍산문화를 일군 주역이 새를 토템으로 하는 조이(鳥夷)로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백민(白民)・발인(發人)・박인(亳人)인데, 후대 중국 사가들이 맥(貊・貃・貉)으로 칭했다고 한다. 맥족은 밝달족이고 단군은 밝달임금이며, 발해만 일대 요서지역에 있던 발조선(發朝鮮)이 밝달조선으로 홍산문화를 이은 국가라고 보았다. 맥이 분파되어 예맥족이 되었는데 이는 혈통적 동질성을 표현하는 말이고, 동이(東夷)는 문화적 동질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의 민족은 종족적으로 모두(한족(漢族)을 포함하여) 맥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찬구는 우하량은 환웅과 웅녀가 만난 단군사화(환웅사화)의 고향으로, 홍산문화 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은 환웅의 조이족과 웅녀의 곰족이 결합해 이루어낸 신시배달국의 일부라고 보았다. 조이족과 곰족이 만나 형성한 신시의 환족(桓族)이 원(原)한국인이라고 하였다. 선도사서의 인식과 동일하다. 우하량 16지점에서 하가점하층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단군조선과의 연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우하량유적이 단군조선 건국의 인적・물적 토대라고 보았다.

역사민속학 분야를 연구하는 임재해는 단군의 조선 건국 이전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문화를 누렸던 환웅의 신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5천년 전의 제단과 사당, 무덤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대규모의 우하량 제의(祭儀)문화 유적은 신정국가(神政國家)인 신시의 문화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산문화 시기와 일치하는 이 지역의 고대 국가체제는 신정국가인 신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 시기를 ʻ고국ʼ으로 평가하는 중국 고고학계 주장을 인정하여, 환웅시대를 신시고국(神市古國)으로 자리매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문식은 돌돌림유적 연구를 통해 홍산문화와 단군조선 하가점하층문화와의 연속성을 밝혔고, 이형구는 홍산문화권을 ‘발해만문명’으로 부르면서 단군조선의 선행문화임을 밝혔다.

우실하는 요서지역의 빗살무늬토기, 옥결(玉玦), 돌무덤, 계단식 적석총, 편두(偏頭) 등은 중원 황하문명에서는 보이지 않고 한반도로 이어졌지만, 홍산문화를 동북아 공동의 시원(始原) 문명권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하였다. 홍산인들 가운데 일부 세력들은 중원지역으로 남하하여 황하문명을 주도한 세력과 만나면서 황제족으로 세력화되었다고 보았다. 홍산인의 일부 세력들은 토착세력이었던 곰토템족으로 환웅족이 이주해 오면서 단군조선의 일부인 웅녀집단으로 합류하였다고 하였다. 홍산문화 시기에 최초로 체계화된 천지인 관념, 원방각 관념, 성수 3의 관념 등도 중원 지역에서는 신선사상, 도가사상으로, 한반도 지역에서는 선도, 풍류도 등의 민족종교로 전승되었다고 보았다.

고고학 발굴 성과를 선도사서의 기록과 결합하여 선도문화로 해석・연구하는 정경희는 ‘단・묘・총(壇・廟・塚) 및 옥기(玉器)’를 표지로 하는 홍산문화를 단군조선에 선행하는 맥족(환웅족+웅족)에 의한 배달국의 ‘선도문화’로 보았다. 홍산문화의 사상・종교적 배경이 샤머니즘(巫)이 아니라 삼원오행론이라는 선도적 세계관에 기반한 선도문화였음을 밝힌 것이다. 편년이 서기전 4000년~서기전 3500년으로 보고된 통화 만발발자 적석단총(1기조단(早段))은 우하량유적과 특징을 같이 하였는데, 대략 수백 년 시차를 두고서 요서 대릉하 우하량 일대로 전파되었음도 밝혔다.

동아시아 상고문화 원류로서 배달국과 그 뒤를 이은 단군조선의 선도문화는 천손문화였는데, 이를 이끌었던 실질적 종주(宗主)는 환웅과 단군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본질인 ‘천・지・인 삼원(천부)’의 진실을 온전히 지켜나갔던 ‘천부의 전승자ㆍ스승이자 군왕’이라고 보았다.

고고학 발굴 성과는 서기전 4000년부터 요동과 요서에 걸친 맥족 배달국의 선도제천 문화권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의 역사적 존재가 고고학으로 확인된 것이다.

연구의 진전으로 환웅천왕의 배달국이 역사 영역 안으로 들어오자 배달국을 운영하였던 사상체계인 선도사상(선도제천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대립과 갈등의 중화주의 유교사관에서 벗어나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가 발현된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배달국 역사 연구를 통해 홍익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자 이제 중화사관이 아닌 홍익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870여 년 이상 중화사관에 오염되었던 역사학 무대에 홍익사관이 다시금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이래 한국 학자들의 홍산문화 성격에 대한 연구는 관심 분야가 각기 다르고 신시나 배달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단군조선의 선행문화로 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개개인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선도사학의 원형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선도적 세계관이 바로 홍익주의였기에 선도사학이 원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홍익사관은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사 이래 인류 역사는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다고 인식되어 왔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인류 역사를 인식하는 전부인양 여겨졌다. 그러나 선도사서에 드러난 홍익주의에 관심을 두고 홍익사관으로 서술된 우리의 상고・고대사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인류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침략・정복・지배의 역사가 아닌 조화・평화・공생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야만 상고・고대 유라시아 문명교류사도 올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중화사관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역사 원형을 회복하는 것과 함께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된 21세기에 선도사학의 홍익사관이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9년~2020년에 최종 발굴된 소남산문화 2기층 옥기묘는 서기전 7200년~서기전 6600년으로 편년되었다. 소남산문화 옥기문화(옥벽류(벽璧・환環・결玦))를 연구한 정경희는 선도제천문화의 옥기문화가 후기 구석기 바이칼 일대의 말타부렛문화→서기전 7000년경 이래의 오소리강 소남산문화→서기전 4000년경 이래의 배달국 백두산 천평문화와 대릉하 청구문화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또한 소남산문화의 주역은 선도제천문화를 기준으로 서술된 선도사서의 환국(桓國) 황궁족(환인족)이라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환웅천왕으로 하여금 배달국을 개창하여 홍익인간・이화세계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가르쳐 지도한 환국의 환인에까지 홍익주의 지평을 넓혀야 할 시점이 도래하였다. 이제 고고학 성과를 기반으로 중국 문헌과 선도사서를 종합 연구하는 방향 전환을 통해 선도사서에 기록된 홍익주의를 연구하여 민족사상・민족문화와 더불어 상고문화를 복원하는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사대·모화의 중화사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되고 일그러진 우리 상고·고대사를 바로잡는 오직 ʻ한 길ʼ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