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해체하고 한민족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 체계를 세우는 임무를 역사학계에 부여하였다. 미군정 시기 친일 세력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역사학을 주요한 체제경쟁 수단으로 여겼던 북한의 초청으로 백남운・김석형・박시형・최익한・도유호 등이 월북하였다. 6・25전쟁 와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던 역사학자 정인보・안재홍 등이 납북되어 공백이 생기자 식민사학 유산으로 비판받던 문헌고증사학이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친일적 행태가 워낙 분명하여 친일세력을 옹호하였던 미군정 아래에서도 진단학회에서 제명운동 대상이 되었던 이병도였지만 1954년 서울 환도 후 이병도가 진단학회 이사장을 맡게 되면서 친일학자 제명 문제는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이병도・신석호는 서울대・고려대・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하여 조선사편수회 역사관과 연구 성과를 전승, 강단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1950년 6.25 이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 계열 학인들이 자취를 감춘 상황에서 이병도 사학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였고, 한사군 낙랑군 위치에 대한 그의 학설은 오늘까지도 주류 강단사학에서는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완성된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주류 강단사학에서도 정체성론・당파성론 등을 극복하고자 광복 이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기백이 반도적 성격론・당파성론・정체성론 등을 처음 본격적으로 비판하였다. 학계에서는 정체성론은 자본주의 맹아론·내재적 발전론으로, 당파성론은 붕당정치론으로 극복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타율성론의 한 축을 이루는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론과 낙랑군 재평양설은 극복되지 못하였고 그 골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면에서는 북한학계의 적극적인 노력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북한학계는 1961년 6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3개월간 7차례에 걸친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열었다. 낙랑군 위치에 대해 문헌사학자들은 고대 요동으로, 도유호 등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평양설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북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리지린의 견해(낙랑군 재요동설)에 힘이 실리고, 1962년 고조선연구가 출간되면서 식민사학의 핵심 쟁점(낙랑군의 위치와 임나일본부설) 중 하나인 한사군 위치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고조선 강역에 대한 리지린의 핵심 주장은 서기전 5~4세기경까지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를 경계로 하였던 국경선이 서기전 3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2천리 강역을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낙랑군 또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정리하였다.

한국고대사 분야 연구에 과거 식민사학 잔재는 말끔하게 제거되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주류 강단사학에서는 타율성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는 주류 강단사학의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노력 중에서 타율성론 부분만을 주로 살펴보았다. 곧, 남인 실학자에서 식민사학으로 이어진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과 낙랑군 재평양설 인식의 대체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주류 강단사학 학자들의 의견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주류 강단사학 입장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와 중학 역사교과서(이하 중학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이하 고등교과서)에 종합적으로 조율되어 반영되므로, 국편의 관점과 중학・고등교과서를 기준으로 살펴보았다. 국편의 관점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달린 주석과 국편의 대중교양・역사교육 사이트인 우리역사넷에 있는 <교과서 용어 해설>과 신편한국사에서 확인하였다.

특히 교과서는 국사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기본 틀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2020년부터 중1, 고1에 적용된 2015교육과정에 따른 중학 역사교과서 채택순위 1~3위 교과서[비상교육, 미래앤, 동아출판 점유율 합:85%]와 위 3개 출판사의 고등 한국사교과서[점유율 합:58.4%]를 살펴보았다.

*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의 모호함

먼저 단군왕검에 대한 인식부터 살펴보겠다.

우리역사넷에서는 단군왕검은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건국자이며, 우리 민족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정의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내용 설명에서는 결국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체로서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고조선 건국 세력 및 지배층의 문화적 기원과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ʻ관념적인 존재’라고 서술하였다. 정의를 내릴 때는 ‘사람’이라고 서술했지만 설명에서는 ‘관념적인 존재’라고 단군왕검의 실체를 모호하게 서술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중학교과서에서는 삼국유사 환웅사화 기록과 동국통감에 의거하여 서기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했다. 한편, 교과서 같은 쪽수에서는 만주와 한반도에 청동기가 보급된 이후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런데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는 서기전 2000년경~서기전 1500년경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고조선은 서기전 2000년경~서기전 1500년경 사이에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건국 시기로 문헌 자료에 나오는 서기전 2333년과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였다는 서기전 2000경~서기전 1500년경 두 가지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 사이에는 300년~800년 이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고조선 건국 시기에 대한 이런 애매모호한 서술은 독자인 학생들로 하여금 ‘단군왕검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존재가 아니겠구나.’라고 판단하게 만든다. 고고학 자료와 비교하여 300년~800년 시간 차이가 나는 문헌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기전 2500년 전후로 편년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고고학 유물・유적을 중학교과서에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양평군 양수리 고인돌유적에서 채취한 숯(교정연대:BCE 2325년)과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유적에서 수집된 숯(교정연대:BCE 2630년, BCE 2630년)에 대한 방사성탄소측정연대는 BCE 25세기경을 청동기 시대 연대로 보게 한다. 북한지역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도 BCE 26세기경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창끝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반영하면 시간적 간극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고등교과서에서는 서기전 2000년경~서기전 1500년경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이후, 세력이 강한 집단의 지배자(환웅집단)가 천손사상을 내세워 주변 집단을 통합하고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워 단군왕검이라는 제정일치의 지배자로서 통치하였다고 했다. 당시 지배자가 누렸던 권력과 부를 반영하는 것이 거대한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라고 하였다. 중학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동국통감에 기록된 단군왕검과 청동기문화가 보급된 이후 고조선을 세웠다는 단군왕검과 사이에는 300년~800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역사넷과 중학・고등교과서는 모두 단군왕검의 실재를 모호하게 처리하였다. 당연히 독자들과 학생들은, 실제로는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우리역사넷 사이트에 게시되어 있는 신편한국사는 단군사화에 나오는 고조선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여 국가단계가 아니라고 명시하여 이런 판단을 더 굳히게 한다. 따라서 주류 강단사학은 ʻ남인 실학자식민사학ʼ이 단군왕검을 부정하는 역사 인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단군조선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겠다.

우리역사넷에서는 단군왕검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왕위에서 물러나 산신이 될 때 나이가 1908세였다는 내용에 대해, 그 기간 동안 단군왕검의 칭호를 가지는 지도자가 대를 이어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재는 인정하였다. 환웅은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외부에서 이주해 온 세력의 대표로 보고, 웅녀는 곰을 숭배하는 토착 집단 대표로 파악하여, 이주민과 토착민 결합에 의해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보았다.

중학교과서에서는 고조선 건국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빈 공백으로 두고 있다. 갑자기 서기전 5~4세기경 중국에서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고, 서기전 2세기경 연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집권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된 단군조선의 2000여 년 역사는 공백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교과서에서도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서기전 3세기경 ʻ부왕(否王)준왕(準王)ʼ으로 세습되었고, ʻ위만한사군ʼ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중학교과서와 마찬가지로 2000여 년 역사를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중학・고등교과서는 단군왕검의 실재를 모호하게 서술하고 2000여 년 역사를 공백으로 비워두고 단군조선에 대한 아무런 내용도 서술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단군조선을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국가로 받아들일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중학・고등교과서에서는 2000여 년 공백 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ʻ부왕준왕ʼ을 ʻ고조선 왕ʼ이라 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단군 후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중학・고등교과서에서 확실하게 역사성을 인정하는 인물은 ʻ부왕준왕ʼ인데 그 계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모호하게 남겨둔다. 또한, 우리역사넷 사료에는 《위략》 내용을 인용하여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는 과정은 설명하지만, 준왕이 ʻ기자(箕子) 후예인 조선후(朝鮮侯)ʼ라는 구절은 생략하여 숨기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모호한 입장을 반영한 때문으로 보인다.

단군왕검 실재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고 단군조선 역사도 공백으로 비워두는 주류 강단사학은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과 기자조선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직도 병립하고 있다. 주류 강단사학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그대로 수용하진 않지만 결별하지도 못하여 선도사학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에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도사서에는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기자조선은 없었다. 단군조선의 정통은 부여로 이어졌다. 《삼성기》와 《북부여기》에는 ʻ준왕위만ʼ 사건은 단군조선 서쪽 변방인 고대 요동에서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대종교사학자)들은 이 관점을 계승하고 있다. 단군왕검도 단군조선도 기자조선도 모두 애매모호하게 처리하여 학생들의 고대사 인식 역시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고대사 서술 목적이 아니라면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