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사서들은 빈번한 내란과 외구(外寇)에 의해 멸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서적들도 조선 태종~성종 시기에 걸쳐 불태워지고 수거되었다. 선도사서 중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부도지(符都誌), 단기고사(檀奇古史),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청학집(靑鶴集), 규원사화(揆園史話) 정도이다. 세조~성종 대에 수거된 사서 중『표훈천사(表訓天詞)』,『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대변설주(大辨說註)』,『원동중삼성기주(元董仲三聖記注)』는『태백일사』에 그 내용이 일부 인용되어 있고,『고조선비기(古朝鮮祕記)』,『삼성밀기』,『지공기(志公記)』, 『조대기』는『규원사화』에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남한 주류 강단사학과는 달리 북한학계는 규원사화는 물론 단군세기, 태백일사 등을 진서(眞書)로 인정하여 사료로서 인용하고 있다.

필자는 현전하는 선도사서에서 보이는 한국 상고・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사서별로 간략하게 정리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민족 고유의 사유체계와 제천의례에 대한 인식이다. 한민족은 고래(古來)로 물질세계인 현상을 바라볼 때 현상만 보지 않고 본질을 함께 바라보는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존재의 본질은 일(一:밝음・생명(氣)・양심)로서 사람만이 밝음을 온전히 갖춘 존재이다. 내 안의 밝음이 우주의 밝음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성통・신인합일) 그 깨달음을 전체 사회 차원으로 확대하여 실천하는 것(공완・홍익인간)이 신시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이었다. 복본(復本)이라고도 표현되는 그 가르침은 바로 밝음이 회복된 이상적인 공동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내면의 밝음 회복은 심신을 단련하는 선도수행 과정을 통해, 사회적 밝음 회복은 국중대회의 제천행사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천은 환인이 환웅에게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명을 내린 이래 신시에서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풍속으로 연면히 이어졌다. 이후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한(韓)의 제천,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제천, 신라의 대・중・소사(小祀)를 거쳐 고려의 팔관회에까지 이어졌다. 유교국가인 조선에 이르러서는 그 위격이 현저히 약화되어 유교 산천제로 변이되었고, 마을제의 형식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중원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한(韓)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이다.

둘째, 한민족 역사의 시작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적 역사인식에서 한민족 역사의 시작은 환국 출신 환웅천왕이 백두산 천평지역에 신시를 세우고 입법・사법・행정(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하는 3백5사(三伯五事) 조직을 갖추어 배달국을 개창함에서 비롯하였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우기 이전에 역년(歷年)이 1565년에 달하는 배달국이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발발자유적으로 대표되는 요동 백두산 서편 천평문화와 우하량유적으로 대표되는 요서 대릉하 일대 청구문화(홍산문화)는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의 선도제천문화를 보여주는 고고 유적이었다.

셋째,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적 역사인식에서는 단군조선의 문화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보았다. 토지개척・궁성축조・글자만들기 등은 물론, 유교 성리학자들이 기자의 치적으로 삼는 ‘예의・농사짓기・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읽기・팔조법금’ 등 문화 교화는 단군조선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9년 물난리를 겪던 중원지역에 치수법을 전할 정도로 수준높은 문화를 누렸던 단군조선은 민주주의적 지도 원리인 화백제도를 시행하고 1/20세로 백성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크게 줄여, 인간(생명)을 존중하고 중시하는 홍익주의 정치를 펼쳐 나아갔다.

넷째, 역사 정통 계승에 대한 인식이다. 한민족 형성 이후 역사 정통은 환웅천왕이 세운 배달국에서 시작하여 단군조선부여열국(동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대방국・한(삼한)・신라・백제・가야 등)으로 이어졌다. 단군조선을 ʻ계승ʼ했다는 기자조선은 선도사서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연나라가 왕을 칭했던 시기(BCE 323년)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연(燕)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번조선 임금이 된 이후 ‘기자조선이라고 전승ʼ된 것으로 보인다. 기후의 후손이 이른바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기준왕이다.

후술하는 (4)~(6)에서 확인되듯이 선도사학을 왜곡한 유교사학의 핵심 키워드는 중화문명 전파자이자 역사 정통을 계승했다는 ‘기자(箕子)’이다. 그러므로 기자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기록을 살펴보면 기자에 관해서는 선진(先秦)시대 기록인 『죽서기년(竹書紀年)』, 『상서(尙書)』 「주서(周書)」, 『논어(論語)』 「미자(微子)」편에 보이지만, 당시에는 기자와 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미 선진시대 문헌인 『관자(管子)』와 『산해경(山海經)』에도 나오지만, 서한 초 복생(伏生)의 구술(口述) 기록인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야 처음으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타났다. 공자의 상서에는 전혀 없었던 기자와 조선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300여년이 지난 후,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상서대전』에 ʻ처음으로, 갑자기ʼ 등장하였던 것이다.

우리 기록에는 12세기 초까지도 고려에는 기자 무덤이 없었으며, 당연히 기자는 사전(祀典)에도 실리지 않았다. 사전이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 각종 제사에 대한 규범이나 규정을 말하는데, 고려 숙종 7년(1102년)까지도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니 국가 차원에서 기자는 전혀 중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123년 송나라 사절 서긍이 고려에서 머물면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선화봉사고려도경』 기록에도 기자와 관련된 사당이나 제사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서긍이 고려에 왔던 1123년 당시까지도 국가차원 혹은 민간차원에서 기자를 숭배하는 것은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00년이 더 지난 14세기(1325)에 처음으로 기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기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한 서한 이후 중국 문헌 기록을 근거로 기자가 봉해진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믿은 고려 유학자들이 기자를 존숭하기 위해 소동을 벌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자는 묘(墓)도 한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 3세기 위(魏)나라 두예는 한반도에는 없는 기자 무덤이 양국의 몽현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중국 산동성 하택시 왕승보촌에는 기자 무덤이 있다.

또한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북사(北史)』(659)에는 전혀 언급도 없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후 285년이나 지나 편찬된 『구당서(舊唐書)』(945)에 비로소 등장하는 기자신(箕子神)을 근거로 고구려 시기에도 기자숭배사상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중화주의에 경도된 유학자들의 필요에 의해 기자가 한국사에 끼워 넣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은말 주초 또는 주대 청동기는 요하 동쪽에는 강하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이나 심양 정가와자 유적에서 중국 계통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이 지역에 어떠한 형태로든 당시 중국 세력이 크게 접근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는 단군조선 사에 기자 또는 기자족과 관련된 부분이 있더라도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원식 토기 등 중원계 주민문화 관련 자료가 대릉하유역에서 확인되지 않았고, 오히려 토착적인 위영자문화가 강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商) 유민 기자(箕子)의 정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된다.

기자집단의 유물이라고 여겨지는 객좌현 북동촌 출토의 기후방정(㠱侯方鼎)에 대해 신용하는 기자(箕子)는 성씨가 ʻ子ʼ이고 기후(㠱侯)의 성씨는 ʻ姜ʼ씨로 서로 다르므로 기후방정은 기자의 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윤내현은 기후방정을 자성 기후의 유물로 보지만, 기자는 단군조선 지역을 통치했던 왕이 아니라 중국의 변방에 있던 소국의 하나였던 기자국의 제후로 바라본다.

고고학 발굴결과도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선도사서 기록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전혀 부당한 것이며, 한국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에 대한 인식이다. 한 나라 국가경영은 수도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이루어진다. 따라서 국가경영 중심 무대인 수도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그 나라 역사 중심 무대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느냐, 요서・요동에 있었다고 보느냐에 따라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가 달라지기에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선도사서에서는 단군조선이 관경(管境: 다스리는 영토)을 삼한(번한・진한・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삼한의 도읍은 각각 소밀랑・안덕향・백아강인데 소밀랑은 송화강 하얼빈, 안덕향은 개평부 동북 70리의 탕지보, 백아강은 지금의 평양으로 단군조선 중심 무대는 한반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요서・요동・한반도 전체임을 알 수 있다. 강역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삼한관경제는 『고려사』 「김위제열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한(漢)나라와 국경을 맞대던 번한 서쪽 지역에서 일어난 위만의 반란으로 기준왕이 쫒겨나고 위만정권이 세워졌다. 위만의 왕검성은 기준왕이 있던 번한 지역에 세워졌고, 한무제 유철의 침략으로 세워진 낙랑군 조선현이 왕검성 자리에 세워졌으니 낙랑군 조선현은 번한이 자리했던 고대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낙랑은 최숭이 세우고 최리로 이어진 ‘낙랑국’이었다. 낙랑왕 최리가 북쪽에 있었던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를 보고 ‘그대는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