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단군시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표명(表明)

경기남인의 영수였던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1740)에서 소중화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는 유교 성리학자의 역사인식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지리적·종족적 화이관에 기반하여 중국과 이적(夷狄)의 우열을 따지는 전통적인 화이관을 부정하고 문화주의적 화이관을 주장했다. 역사의 정통체계를 단군-기자-마한-통일신라의 흐름으로 이해하여 단군정통론을 주장하였으며, 한국고대사의 무대를 압록강 동쪽으로 국한하지 않고 요심(遼瀋;요양·심양)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단군을 동방의 정통으로 간주한 것은 단군조선을 이미 중화의 단계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고대사는 요순・3대 문화의 동방적 전개로서 소중화로서의 정통성을 가지며, 그 정통의 시발은 요・순・우와 동시기로 이는 기자정통시발설(箕子正統始發說)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지만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설』)도 가지고 있었다. 문명의 시작과 중심은 중화라는 중화사관에 철저히 얽매여 있는 역사인식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익이, 단군조선을 과연 중화의 단계로 보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단군의 강역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기자가 봉한 지역이 연나라와 접근해 있어 요서·요동지역이 모두 영토 안에 들어있었으나 진개의 침략으로 서쪽 영토를 잃고 패수인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관구검이 압록강 서쪽에 있는 환도성을 침략할 때 현도에서 와서 낙랑으로 퇴각한 사례를 들며 낙랑과 현도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고, 진번은 요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임둔군 이외의 3군이 모두 요동, 요서에 있다고 하여 연나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인식도 보여준다. 진개의 침략 이후 압록강을 연(燕)과의 국경으로 삼았는데, 한(漢)의 3군인 낙랑·현도·진번이 요동·요서에 있다고 하였으니, 진개에게 뺏긴 요서·요동의 영토를 되찾은 이후 그 땅을 위만에게 공탈(攻奪)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낙랑군에 대해서는 치소는 요동에 있었으나 관할지역은 지금의 평양까지라는 혼재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기전 82년 이후에는 평안도와 강원도가 모두 낙랑에 속한다고도 하였다. 낙랑군치를 요동으로 본 것은 당시로서는 진전된 인식이었으나 관할지역이 지금의 평양까지라고 본 점에서는 낙랑군 ʻ재평양설ʼ을 부정하지는 못한 절충론이었다.

문화주의적 화이관을 주장하여 화이를 가르는 기준을 문화의 우월성에서 찾은 이익에게 조선이 고대로부터 공자도 인정하는 문명국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공자도 높였던 주(周)왕실에 홍범구주를 설파하고, 문명을 전파하여 고대 조선을 교화한 기자시대의 문화발전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은 더 낮추어 보아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ʻ혈통은 단군에서 시작하지만 문화의 중심은 기자ʼ라는 유교 성리학자들의 인식이 이익에 이르러 처음으로,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은 아주 낮았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ʻ표명ʼ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애초 기자시대에 문화가 발전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단군시대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지만,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이 낮았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익이 천여 년 지속된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이 아주 낮았다고 공식 표명한 이후 단군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성호학파 고대사 인식에서 공식화되었다. 안정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의 정통에 대한 혼란과 단군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스승의 역할과 책임은 그만큼 막중한 것이었다. 시대는 변화하였지만, 중화 문명 전수자라는 기자에 대한 존숭이 강화될수록 단군에 대한 인식은 약화되었고 심지어는 역사적 실존을 부정당하기도 한 것이다.

이익은 한국사 정통이 삼한(마한)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는데, 한백겸의 주장을 따라 한강을 경계로 하여 조선과 삼한이 북과 남으로 분립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한백겸은 중국문화 영향(위만조선・한사군)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삼한을 보았다. 그러나 이익의 ‘삼한정통론’은 은나라의 문화, 중국 한나라의 백성, 주나라의 문화가 명맥을 유지하며 신라로 이어져서 예절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한백겸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전기 관찬사서인 『동국통감』은 사대적인 역사서술로 비판받는 『삼국사기』보다 더 철저하게 사대주의 중화사관에 의해 편찬되었다. 민족사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중심으로 삼한을 바라보는 이익의 역사 인식은 삼한 주민을 토착민으로 보는 조선전기 『동국통감』보다도 더 퇴행한 것이었다.

안정복, 단군 정통에 대한 혼란한 인식과 낙랑군 재평양론의 강변

성호학파로서 이익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안정복은 『동국통감』(1485) 이후로 가장 방대하고 체계가 잡힌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사서 『동사강목(東史綱目)』(1778)을 집필했다. 이 책은 사실고증 업적으로 뒷날 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내용 중 지리고(地理考)로 인하여 근대 역사가들이 『동사강목』을 필독의 책으로 여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안정복은 역사 정통의 시작이 기자에서 시작된다고 서술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단군이 정통이라고 하는 등 정통의 시작에 대해 일관성 없는 혼란한 인식을 보여준다. 『동사강목』 목록에서는 역사의 시작이 기자로부터임을 말하고 있다. 범례에서도 기자가 정통임을 말하며(“今正統始于箕子而檀君附見于箕子東來之下”, 동사강목), 실제 본문 서술도 기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범례 다른 곳에서는 정통이 단군에서 시작한다(“正統謂檀箕馬韓新羅文武王”, 『동사강목』)고 하고, 동사강목도(東史綱目圖) 상(上)에서도 정통의 시작을 단군으로 그리기도 한다. 우리 역사 정통의 시작에 대해 일관성 없이 혼란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선도사서 계통인 고기(古記)류에 기록된 단군 사적을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按東方古記等書所言檀君事 皆荒誕不經”, 『동사강목』)고 하였다. 중이 적은 기록으로 환인(桓因)이 전해짐으로 인해 기자의 인현(仁賢)의 고장의 말이 괴이하게 되었으니 통탄한다고도 하며, 급기야 삼성사(三聖祠)에서 제사지내는 삼성 중 단군제사만 남기고 환인・환웅은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단군조선의 문화, 사적을 서술하였으나 이는 중국 성인인 요・순의 교화 영향으로 보았고, 기자가 와서 인현의 교화를 베풀었다는 인식은 이익과 별다르지 않았다. 6년간의 서간(書簡) 문답을 통해 이익의 영향도 받았겠으나 중국 중심 사료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사료들의 내용만을 신뢰하여, 주자성리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18세기 유교 성리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안정목은 "역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강역을 먼저 정해놓아야 한다"고 지리고증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안정복의 지리고증 방식은 아주 독특하였다. 『한서』 지리지와 『통전』 기사를 인용하고 나서 "지금의 평양은 낙랑"이라고 자의적으로 단정하였다.(“前漢誌樂浪郡治朝鮮縣 註云以右渠所都爲治所也 應邵曰樂浪故朝鮮國 通典亦云平壤城卽漢樂浪郡王儉城 今平壤之稱樂浪其來久矣”, 『동사강목』) 그런데 안정복이 단정한 문구 앞에 인용된 문구 어디에도 지금의 평양이 낙랑이라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안정복이 인용한 응소는 『사기』 조선열전에서 (낙랑군이 된) 조선왕의 옛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이다(“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고 기록하였다. 두우 또한 『통전』에서 낙랑군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비롯한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통전 변방 고구려)고 하였다. ʻ낙랑군 수성현ʼ에는 한반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괄지지』를 인용하여 ‘조선 남쪽 경계까지는 6백리’인데 조선은 곧 낙랑군치이니, 지금의 평양에서 한강까지는 550리라고 하였다.(“樂浪 按括地志曰朝鮮南界六百里 朝鮮卽樂浪郡治 今平壤至漢江五百五十里”, 『동사강목』) 낙랑군치에서 남쪽 경계가 600리인데 지금의 평양에서 한강까지 550리로 비슷하니 낙랑군치가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거리가 비슷하다는 주장이 낙랑군치가 지금의 평양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괄지지』에는 ‘朝鮮南界六百里’라는 구절이 없다. 『괄지지』에 기록된 해당 구절은 ‘南至新羅國六百里’이다.(“南至新羅國六百里 北至靺鞨國千四百里”, 『括地志』) 안정복이 기자강역고에서는 ‘南至新羅國六百里’라고 『괄지지』의 해당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낙랑고에서 ‘朝鮮南界六百里’라고 쓴 것은 안정복의 의도된 표현이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료의 원문을 변개한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료를 변개할 정도로,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강한 선입견에 빠진 안정복은 이후 한・중 관련 사료를 모두 이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다. 장통이 미천왕과 수년간 싸우다가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한 것을 ‘요동에 별도로 설치(別置遼界)’했다고 하여 지금의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았다. 소위 ‘낙랑군 교치설’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은 입증하지 못한 채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주장일 뿐이었다. 입증해야 할 주장을 입증하지는 못한 채 주장을 사실로 전제(前提)하고 나서, 그에 근거해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어야 하므로 ʻ낙랑국ʼ 최리왕이 대무신왕에게 항복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은, 세력이 한 국가처럼 강해서 왕이라고 칭한 것일 뿐, 낙랑군은 중국의 행정구역이므로 왕이라는 칭호를 쓴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관구검의 침략 이후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247)하였는데, 한나라 낙랑군이 그 평양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므로 사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낙랑군 치소가 동쪽으로 옮겼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안정복은 후한 화제 때 최인이 낙랑군 속현인 장잠현의 장이 되었다고 인용하였다.(“和帝時崔駰爲長岑長卽樂浪屬縣也”, 『동사강목』) 그런데 『후한서』 최인열전에서는 ‘其地在遼東’이라 하여 낙랑군 속현인 장잠현은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안정복이 인용한 인용문과는 달리, 원문에는 장잠현이 낙랑군에 속한다고 하고 나서 바로 뒤에 ‘그 땅은 요동에 있다’고 명기(明記)되어(“出為長岑長 【長岑縣屬樂浪郡 其地在遼東】”, 『後漢書』) 있는 것이다. 안정복에게 낙랑군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에 있어야 했으므로 ‘그 땅은 요동에 있다’는 구절을 인용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은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지리지 『성경지(盛京志)』(1684)에서 『요사(遼史)』를 인용하여 ‘한나라 장잠현은 동경[요양] 동북 150리에 있었다’고 기록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안정복에게 전한・후한(前漢・後漢) 때에는 낙랑군에 속했다가 진나라 때에 대방군에 속하게 되는 장잠현이 요동 땅에 있을 수는 없었다. 장잠현이 요동에 있었다면 대방군의 속현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長岑後漢同晉屬帶方 按盛京志引遼史云 崇州本漢長岑縣在東京東北一百五十里 此說非也 長岑若在遼地則後來何以屬帶方耶”, 『동사강목』) 낙랑군이 조선 평양에 있었다고 믿고 있던 안정복에게 낙랑군 둔유현 이남 황무지를 쪼개 만든 대방군은 당연히 한반도에 있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ʻ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ʼ는 선입견이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게도 만들고 사료를 일부러 누락시키게도 만든 것이다. 자신의 논지 전개에 방해가 된다고 문헌에 기록된 문구를 빼버린 후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고, 반드시 필요한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도 회피한 상태에서, 사료를 조작하면서까지 자의적인 판단으로 근거 없이 ʻ지금의 평양이 낙랑군ʼ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고증(考證)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낙랑을 자의적으로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한 안정복은 “이에 의거하면 양한 및 조위시대에는 낙랑이 항상 중국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단정하기도 하였다.(“據此則兩漢及曹魏之世 樂浪常爲中國之地矣”, 『동사강목』)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단군 기록을 삭제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에게 단군을 말살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용되었듯이, 안정복의 자의적인 지리고증은 중국의 역사지리학자 담기양에게 한나라, 위나라의 국경선을 평양까지 그리게 만드는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위나라가 평양까지 점령하였다는 동북공정 논리는 결과적으로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제공한 셈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