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모화의 성리학이 국가・사회를 유지하는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범람하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인해 민족정기 수호마저 위태롭던 구한말, 선도사학은 대종교사학 형태로 역사에 재등장하였다.

1909년 서울에서 나철과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중창한 대종교(大倧敎:初名 단군교(檀君敎))는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워진 종교단체로서, 수행에 기반한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종교 형태으로 되살린 것이었다. 대종교는 사상면에서 선도 경전인 《삼일신고(三一 誥)》를 중심으로 하였고, 수행면에서 선도의 지감・조식・금촉 수행론을 따랐다(성통). 실천면에서는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적 기준에 따라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하였다(공완).

비록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신시배달국 역년을 축약했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신인(神人)이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니고 풍백・우사・운사・뇌공을 거느리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도(神道)를 베풀고, 곡식・목숨・질병・형벌・선악의 5사(事)와 각종 인간사를 다스리며 교화(敎化)했던 신시시대(神市時代)가 단군조선에 앞서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한민족 역사를 단군조선 이전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는 선도사학 역사 인식이 대종교사학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1910년대의 민족사학은 대종교와의 밀접한 관련 위에서 전개되었고, 1910년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신채호, 박은식, 김교헌 역시 모두 대종교도였으므로, 민족사학을 ʻ대종교사학ʼ이라 명명하였다. 비록 민족사학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그 내용적 실체가 모호하고 실제 사상적 기반은 대종교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역사인식에 기반한 역사학을 ʻ유교사학ʼ이라 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종교 중광(重光)에 결정적 계기가 된 1909년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교본으로, 사대(事大)의 정신적 폐해를 공박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심어줌과 더불어 국권 회복을 통한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던 단군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저항적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였던 독립군에게 대종교사학(선도사학)은 더없이 강력한 사상적 무기였고, 일제하 대종교 교당은 곧 민족주의 교육의 학교이면서 독립운동 전초기지였다.

대종교사학이 등장하면서 유교사학에서 삭제하였던 민족 고유 선도사상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채호는 우주의 광명(光明:환함)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5월・10월에 소도(蘇塗:수두)에서 하느님(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고유종교로서 선교(仙敎)가 있었음을 설파하였다. 선교는 피세(避世), 장생(長生)에 관심을 두는 중국 도교와는 그 역사와 성격을 달리하였는데, 조의(皂衣)나 화랑에서 알 수 있듯이 ʻ현세ʼ에서 국가・사회에 헌신하였다고 하여 개인적인 수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한국선도의 본모습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여 주었다.

박은식은 단군이 강화도 마니산에 제단을 쌓아 제천보본(祭天報本)하던 예식이 부여・예・고구려・백제는 물론 요나라와 금나라에까지 전해졌음을 밝혔다. 단군시대에 신도(神道)로써 백성을 교화했던 그 종교를 신교(神敎) 또는 배천교(拜天敎)라 했는데,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인 종교라고 하였다.

김교헌은 단군왕검이 마니산에 참성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는 매해 10월 국중대회 형식으로 부여(영고)・예와 맥(무천)・진한과 변한(계음(禊飮))・마한으로 전해졌다고 하였다. 신교의 한 갈래는 중국으로 퍼져서 장생의 도를 닦는 신선(神仙)문화가 되었음도 밝혔다. 또한 그는 대종교 교리 정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사서와 민간 자료에서 수집된 단군에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단조사고(檀祖事考)》(1911), 《신단실기(神檀實記)》(1914), 《신단민사(神檀民史)》(1914)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민족 고유 사상을 정리하고 민족사를 체계화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김교헌의 공(功)은 ʻ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세운 공보다 더 큰 것ʼ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대종교사학은 한국고대사 정통 계승에서 단군조선의 정통은 부여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므로 기자 중심의 유교적 역사 인식 체계를 뒤집었다. 신채호는 기자 자신이 아니라 기자 후손이 서기전 323년에야 불조선(번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아 기자조선을 삭제하였다. 이는 ʻ단군조선▶부여▶열국ʼ으로 정통이 이어진다는 선도사학 인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성균관 박사 출신 유학였지만 중화주의 유교사학의 틀을 벗어버렸기에 이러한 인식 전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유교의 틀에서 벗어난 후 민족을 만났던 박은식의 생각은, 소중화 정신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던 무치생(無耻生)에게 금태조의 입을 빌려 “존화양이의 대의를 고집한다면, 만일 漢나라의 순체・양복, 唐나라의 소정방・이세적이 다시 쳐 들어와도 앞장서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그 군사를 환영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질타하는 부분에서 잘 읽을 수 있다.(「夢拜金太祖」) 박은식은 중토에서 동래한 중화인 기자는 귀화・동화되어 기자 후예들은 단군 후예가 되었다고 보았다. 기자는 연나라와 접하는 단군조선의 구석진 땅(요서 영평부 조선성)에 살았다고 하여 기자 중심의 유교적 역사인식체계를 부인하였다.

김교헌은 중국에서 이주하여 귀화한 기자와 그 집단은 영평(永平)과 광녕(廣寧) 사이 비어있는 땅에 나뉘어 살았다고 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기자조선을 부정하였다.

이상룡도 기자를 중심으로 삼은 정통 계승 체계를 부인하고, 단군조선 혈통은 ʻ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ʼ로 이어지면서 3천 년간 부절(不絶)했다고 하였다. 「배구전(裵矩傳)」을 인용하여 해주(海州)는 옛 고려(고구려) 땅이자 기자가 봉해진 땅으로,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는 해성(海城)으로 보았다.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에 대해 신채호는 단군조선 문화수준은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중원지역의 물난리를 해결하는 치수법(通水之理)을 전수해 줄 정도로 높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한사군 낙랑군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편차를 보여 주었다. 역사 연구 초기에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대동강・청천강 유역은 기씨・위씨・유씨(한무제 유철) 등 지나족(支那族)의 수라장”으로 “평안도에는 지나족이 바야흐로 강성하였다”고 하여 낙랑군 ʻ재(在)평양설ʼ을 인정하였다. 1914년 봉천성 회인현에서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과 인연을 맺으면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한 이후에야 기자 후손이 다스리던 번조선을 전복한 위만의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관점을 교정하였다.(《조선상고사》)

박은식은 기자 후손인 조선후가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여, ʻ기준왕ㆍ위만ㆍ한사군 낙랑군ʼ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교사학의 통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김교헌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을 인용하여 한(漢)낙랑군은 요양(遼陽)에 있었다는 낙랑군 ʻ재(在)요동설ʼ을 인정하였다.

이상룡은 수사(隋史)에는 ʻ좌우 20군(軍)이 현토・낙랑 등의 길(道)에서 나와 압록강 서쪽에서 모였다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ʼ고 하여 한사군이 설치된 곳은 요동지방으로 보았다.

신채호나 박은식도 한사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교사학 역사인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1911년, 고성이씨 가문 이상룡은 이미 기자조선, 한사군의 일을 한반도가 아닌 요동지방에 국한한 일로 보고 있었다. 중국사서도 참고하였겠으나 가전(家傳) 선도사서인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읽은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고등왕(高登王) 천도는 단군기원 1060년 갑자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단군세기》에만 나오는 ʻ고등왕ʼ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유교사관과 유교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저류화되었던 선도사학은 1910년대 대종교사학 형태로 재등장하였으나 시대적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사상 면에서는 수행(성통)과 사회적 실천(공완)을 본령으로 하는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수용하여 선도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원형을 회복하는 ʻ과정ʼ에서 등장한 것이 대종교였기에 하느님・삼신을 선도 본연의 생명(기)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삼성(환인・환웅・단군)이라는 인격신으로 보았던 점에서 종교적 요소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수행에 기반한 선도수행문화로 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민속・무속문화로 종교화되어 있었기에 재등장 시에 종교의 방식을 뛰어 넘지는 못한 것이었다.

역사 인식 면에서는 선도사학을 수용하여 한민족 역사의 시작을 신시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역년을 축약하였다는 면에서 선도사학의 온전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는 1980년대~199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고고학 발전을 기다려야만 하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였다.

낙랑군 위치를 바라보는 데에서는 남인 실학자들의 관점인 재평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고, 평양에서는 벗어났으나 요동에 머물러 요서까지 시각을 넓히지는 못하였다. 선도사서 《삼성기》, 《북부여기》에 한사군 낙랑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선도사학 연구를 우선하기보다는 풍찬노숙하는 독립투쟁에 매진해야만 했던 시대였다. 이 역시 1980년대 이후 역사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인해 독립투쟁은 일차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ʻ저항적 민족주의ʼ에 집중되었다.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과정으로 바라 본 연원일 것이다. 박은식이 금태조(金太祖)・동명왕(東明王)・대조영(大祚榮)・천개소문(泉蓋蘇文) 등 만주를 누볐던 고대 영웅들의 전기를 잇달아 발표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종교에 기반하여 단군 자손으로서의 민족정체성 정립이 우선시되었기에, 선도사상의 본령인 조화・평화・공생의 ʻ홍익주의ʼ에까지 인식이 미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독립투쟁은 인간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생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지향점이 같은 사회적 실천이었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대종교인들은 ʻ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ʼ 홍익주의라는 선도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사회적인 실천(공완)을 하는 삶을 영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