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사관’, 드디어 발아하다
‘홍익사관’, 드디어 발아하다
  •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 k-spirit@naver.com
  • 승인 2022-08-13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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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7)

1920년대 만주에서의 무장 항일투쟁을 주도하던 대종교는 1930년대 초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김교헌(金敎憲)・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김혁(金赫) 등 주요 지도부들을 잃었다. 또한 다수의 지도부가 일경에 체포되어 지도부의 부재, 교세의 약화로 1930년대의 대종교 항일운동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감행하였다.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미곡을 강제 공출 하는 등 경제적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경제적・인적 수탈과 더불어 민족말살을 획책하는 황국신민화 정책도 추진되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결합하여 노동조합운동, 농업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갈수록 심화되는 계급모순을 민족모순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풀고자 했던 안재홍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정치투쟁을 사명으로 하는 단일정당의 매개형태로서의 신간회’ 활동 시기에도 친일파와 타협적 민족주의를 배제한 위에서 민족적 좌익 전선을 형성하여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대중과 함께 풀어가고자 하였다.

안재홍은 문제 해결의 답을 조선 고대 역사 연구에서 찾았다. 안재홍은 조선 고유의 ‘ᄇᆞᆰ’, ‘ᄇᆞㅣ어’ 사상을 고대 아시리아 문화양상과 비교하면서 조명하였고, 화백(和白:여러 사람이 다 그 의견을 ‘사리’게 한다)으로 알려진 고래(古來)의 민주적인 입법행정회의를 찾아냈는데, 이는 인류 공통의 고대사회의 역사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고유의 것이지만 세계적 보편성에 귀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좌우합작(사회주의운동+비타협적민족주의운동)과 ‘단일’ 정당을 만들어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으로 안재홍은 고대 한민족 역사 속에서 건국이념으로 실천되었던 ‘홍익인간’을 조선 역사에서 찾아내어 「다사리」 개념으로 구체화하였다. 대중공생(大衆共生)・만민공화(萬民共和)라는 고래(古來)의 민주주의에 대한 안재홍의 「다사리」 사상은, 향유(享有) 대상을 전민족・전민중으로 확장하고 삼균주의로 그 내용을 채우면서 1945년에 신(新)민족주의, 신(新)민주주의로 개념화되어 나타났다.

안재홍은 1910년대에는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역년을 축약하였다는 한계를 안고 등장했던 신시시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하였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을 서울로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칭하기 이전부터 아사달은 ‘단군 이전의 여계(女係)시대의 혈족ㆍ씨족 등(의) 생활공동체였던 곳’이라 하였다. 《조선통사(朝鮮通史)》(1941)에서는 이를 좀더 구체화하여 6000여 년 전 환웅천왕이 삼천단부(三千團部)를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神市) 사회를 연 것이라 하였다.

단군조선 이전인 신시시대에 백두산 천평지역 신시 사회에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안재홍의 역사인식은 선도사서인 《삼성기》나 《태백일사》에 나타나는 선도적 역사인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다.

안재홍은 유교적 역사인식의 핵심 키워드였던 기자에 대해서는 언어학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대공(大公)을 뜻하는 ‘크치’를 한자로 표기할 때 기자(箕子)라고 적으면서 은나라 기자와 혼동이 생겼다고 보았다. 대공인 크치가 다양하게 문화를 발전시킨 업적이 중국계 이주민에게 알려진 후, 크치가 기자로 속단되면서 은나라 기자가 동이를 교화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중국문화에 현혹됨이 고조에 달한 고려 시기에 엉뚱하게도 기자동래설이 받아들여졌지만, 역사상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기자조선은 없었다고 하였다.

정인보는 1934년 다산(茶山) 정약용 서거 99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안재홍과 더불어 ‘조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의 조선학은 민족적・민중적・실용적 학문인 실학(實學)으로서 맹목적으로 수용된 주자학(朱子學)을 가리키는 허학(虛學)의 대칭 개념이었다. 자심(自心:주체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외래사상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조선 역사를 조선 민족의 자심인 ‘얼(정신)’이 발현・전개되는 역사로 보았고 조선 얼의 기원과 내용을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에서 찾았다.

홍익인간 정신은 조선이 조선으로 되게 하는 근본 연원으로 5000년 역사 속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조선의 얼이었다. 홍익인간의 가르침은 나라를 일으켜 다스리는 법도로 오랫동안 계승되었다.(顧命世子儒留王 以道輿治(광개토왕 비문); 有玄妙之道(난랑비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조리가 치밀해져 홍익인간 이념을 근본으로 살을 덧붙이는데, 고유 문화가 축적되면서 생겨난 세속오계(世俗五戒)가 대표적이다. 오로지 인간을 근본으로 삼되 개인이나 집안보다는 겨레를 소중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회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개인의 수행에 침잠(沈潛)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중시여기는 선도에 대한 정인보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얼’, ‘현묘지도’로 표현된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고유 사상이지만 외래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포용성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가 본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것이지만 환웅에서 비롯한 홍익의 뿌리 때문에 중생구제에 더 뛰어나게 된 것이 조선불교의 핵심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단군과 태자 부루에서 비롯된 역사의 정통은 부여로 계승된다고 보았고, 기자조선은 유학자들에 의해 단군조선의 중간에 끼워 넣어진 존재로, 날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신채호의 학설들을 더 구체적으로 논증하였는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일제 식민사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이 제기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1930・40년대 선도사학은 그전 시기와는 달리 단군사화(환웅사화)에도 나타나는 ‘홍익인간’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저항적 민족주의 단계에서는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정립하고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여 자주독립 의지를 제고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시기에는 단군조선의 역사에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해결을 포함하여) 미래를 전망하는 지침을 찾아낼 수 있는지까지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재홍은 만민공생의 민주주의인 홍익인간을 찾아내었고, 정인보 역시 외국의 사상・문화와도 어울리는 포용성을 지닌 홍익인간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안재홍은 다사리(화백)라는 고래의 민주주의를, 향유대상을 전민족・전민중으로 확장하고 정치・경제・문화를 균등하게 누리는 삼균주의로 내용성을 채운 후 신민주주의라 하였는데, 삼균주의는 홍익인간의 핵심 내용으로 조소앙이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이미 밝힌 것이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 제도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先民이 明命한 바 首尾均平位하면 興邦保太平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 각계급의 智力과 權力과 富力의 향유를 균등하게 하며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하라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 공리임.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는 한 민족, 한 나라에 국한된 사상이 아니었다. 조소앙과 안재홍을 예로 들어본다면 그 당시에 그들은 이미 국제주의자・세계주의자였다. 조소앙은 1940년 발표한 「한국독립당 당의해석」에서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내지 세계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정치・경제・교육 세 차원에서 균등이 실천되어야 한다는 광의의 삼균론까지 거론하였다. 안재홍도 1945년에 발표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에서 신민족주의를 “나라 안에서는 민족자존의 생활협동체이고 나라 밖으로는 국제협동의 선의의 분담자로서 배타・독선의 그것과는 엄별(嚴別)된다”고 하였다.

1910・20년대에는 수행문화로서의 선도를 보지 못하고 종교로 보는 등 선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있었고, 일제와의 무장투쟁에 전념하여 평화・공생의 홍익주의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당연히 홍익주의에 기반한 홍익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보지는 못하였다.

1930・40년대는 일본의 대륙침략으로 한반도가 병참기지화 되고 강제수탈이 더욱 강화되어 민족모순에 더하여 계급모순까지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공생을 위한 계급간의 연대, 국제적으로는 평화적인 공생을 위한 피압박민족간의 연대가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하였다. 단군조선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평화・공생의 홍익인간,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도 포용하는 홍익인간사상에까지 인식의 폭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저항적 민족주의 수준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를 인식하게 되었고,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인 홍익사관이 발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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