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연속된 국난으로 조선은 미개하다고 여겼던 왜와 청에게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몰렸다. 그러나 지배세력인 유교 성리학자들은 신분제(身分制)나 공납(貢納) 등에서 드러난 사회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도 미약했다. 정통 성리학자들과 보수 세력의 끈질긴 저항으로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는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데 무려 100년이나 걸린 사실에서 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양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경험하면서 성리학은 국가・사회 지도이념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명・청이 교체되는 17세기 중엽 대격변기는 동북아 세계질서 변화와 함께 세계관 변화도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란을 거쳤음에도 이단을 배격하는 주자성리학의 교조주의적 성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남인 윤휴(尹鑴, 1617~1680)가 서인 주자학자로부터 ʻ사문난적(斯文亂賊)ʼ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그로부터 40여 년 뒤에 박세당(朴世堂, 1629~1703)도 같은 죄목으로 목숨을 잃었던 사실에서 탈주자학적인 시도를 용납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조선 지배 세력인 주자성리학자들은 어지러워진 사회 질서를 지배층 입장에서 재편성하고 대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정밀한 예론(禮論)을 전개하였다. 양란으로 흔들리던 신분 질서를 주자성리학 이념으로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주(程朱)의 주소(註疏)를 교조적으로 따르지 않고 원시유학에서 유학정신을 새롭게 찾고자 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관념화・형식화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고자 하는 흐름도 형성되었다.

명・청 교체의 대격변기가 지난 18세기 초에는 대명절의(大明節義)를 부르짖으며 청나라에 불복한다는 의미에서 국가 차원의 대보단(大報壇)을 설립하고 제사하는 등 중화계승의식이 형성되고 정통론이 강화되었다. 대부분 주자성리학자들은 중화질서가 붕괴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중화질서를 회복하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지배층은 조선을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인식하고 ‘정통론’이라는 역사인식을 강화시켰다. 정통론은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을 구별하는 전통적인 화이관으로, 도덕문명 정통성은 오직 중화족에게만 있다는 주장이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천하에 오직 소중화인 조선만이 남게 되면서 조선에도 정통론의 적용이 가능해졌다.

비로소 조선이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가 태동하였다. 청나라가 중원대륙을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도 ‘성리학적 중화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념 속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 고유 가치와 문화로부터 독자적인 중심주의를 도출한 것이 아니라 주자학적 보편주의를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미 망한 명나라의 유교 문물을 인정한 위에서 그것을 계승・보전하는 것일 뿐이었다.

조선은 주나라 초기 기자가 문명을 전파함에서 시작했으며, 공자도 인정했듯이 처음부터 중화와 같은 수준의 문화전통을 간직한 문화국가였다는 인식이 더 확산되었다. 공자가 중화문화의 정수로 인정한 주(周)나라에 홍범구주를 전파한 은(殷)나라 현인 기자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를 보는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대중화(大中華)는 현실에서 사라졌으나 소중화가 중화주의를 이었고, 소중화가 될 수 있도록 문명을 전달한 기자가 강조되면서 중화사관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적 주자성리학에서 벗어나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유학정신을 새롭게 찾고자 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흐름도 조선중화주의와 마찬가지로 ‘화・이’라는 차등 관념을 전제로 한 문화적 화이관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문화적 화이관은 화이(華·夷)와 중외(中·外) 구분은 태어난 지역이 아니라 그 정치가 인(仁)하냐 학(虐)하냐에 따라 구별하여야 한다는 즉, 문화[인(仁)・의(義)・강유(綱維)・예법(禮法)]의 유무(有無)라는 층위에서 화와 이의 위계(位階)를 설정해야 한다는 청나라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의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허목에서 시작된 고학(古學)은 주자성리학을 교조적으로 따르지 않고 고경(古經)을 통해 유학정신을 새롭게 찾고자 하는 흐름으로, 이익・정약용 등 경기남인의 학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허목은 주자학을 반대하는 자리에 육경고학을 두었으나, 선도사서의 영향도 일부 받았다. 허목과는 달리 이익 이래 경기남인 실학자들은 선도사서를 철저히 배제한 위에서 육경고학에 관심을 두었다. 그런데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화사관은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비롯되었으나, 중화문화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화이론적 인식은 오행의 중심에 통제점인 토를 놓고 제왕의 도를 주창한 요(堯) 시대에 이미 존재했었다. 육경(六經)이 태동하던 시기 이전부터 화이론적 인식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시유학에 관심을 두고 화・이를 가르는 기준점을 문화의 층위(層位)에서 찾았던 남인 실학자들의 문화적 화이관에서는, 고대 조선을 공자도 인정하는 문명국으로 교화하였다는 기자에 대한 존숭(尊崇)은 더 강화되었고, 상대적으로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은 더 저열하게 인식되었다.

급기야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안정복은 단군왕검의 사적은 모두 ‘터무니없고 근거가 없다(荒誕不經)’고 하였고, 정약용은 왕검(王儉)은 지명이었던 왕험(王險)의 ‘험(險)’을 ‘검(儉)’으로 바꾼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사 관점에서 본다면, 남인 실학자들의 상고・고대사 인식은 유교사학에서도 가장 퇴행한 역사 인식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화되고 형식화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배청숭명(排淸崇明)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청나라 문물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강조하는 새로운 학풍이 나타났다. 노론계의 일부 소장 학자들이 중국 사행을 경험하면서 청나라에 수용된 서구문화를 직접 목도하고 확인하면서 큰 자극을 받은 데에서 나타난 것이다. 18세기 후반, 청나라를 야만시하고 적대시하던 이전의 태도에서 벗어나 청나라로부터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여 조선 경제를 풍요롭게 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것을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인 북학파가 등장한 것이다.

북학파는 그 시대의 모든 학술을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로 이해하고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북학파는 객관적 지식체계 수립을 모색하여 서학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도가와 불교 등 이단에 대해서도 섭취하려는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연행하는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 온 박지원이 보여준 고대 평양에 대한 인식(“漢樂浪郡治在遼東者 非今平壤乃遼陽之平壤”, 열하일기)은 그 개방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조선후기 역사 서술은 주로 실학자들이 주도했다. 이 시기 사학의 특징은 정통론과 강목체의 유행, 경학(經學)으로부터 사학(史學)의 독립, 전문 역사학자의 출현, 개인 사서편찬의 증대, 역사지리학의 발전, 광범위한 사료수집과 문헌고증 중시로 인한 역사학 방법론의 발전 등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문헌고증 방식은 그다지 치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방식이 많이 보이는 문제가 드러난다. 현지 지리를 살필 기회가 적었고 주로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였다고 하나 기실은 중국 문헌들을 자의적으로 이용・해석하고 민족 고유의 선도적 역사인식에 근거한 사서들은 철저히 배제한 결과였다.

실학(實學)은 조선후기에 자생한 자본주의적 요소와 신분제 변동에 대한 연구와 함께 근대의 기점과 근대사의 자주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안재홍은 ‘실학파’, 특히 정약용의 학문에서 근대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하였다. 안재홍은 정약용의 사상을 “근세 국민주의의 선구자”, “근세 자유주의의 거대한 개조(開祖)”로까지 평가하였다. 실학사상에서 근대적 경향을 찾아내게 되자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반박하고 조선의 주체적 근대화 맹아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학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실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인식(역사지리 비정)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남인 실학자들의 역사인식은“조선후기 새로이 대두하던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 편입하려는 움직임, 국사 영역의 만주로의 확대, 고토회복 의식 등과 같은 새로운 역사학의 흐름(북학파는 대체로 이에 속함)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민족사 관점에서는 남인 실학자들의 상고・고대사 인식이 유교사학에서 가장 퇴행한 것이었음에도 ‘식민사학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었다. 한영우는 “이병도의 한사군 연구는 결과적으로 한사군의 중심지가 한반도에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어쨌든 그의 학설은 오늘까지도 우리 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한영우, 「이병도」,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 창비, 1994, 262쪽.)고 한다. 오영찬은 “한사군의 역사 지리에 대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방법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연구과 이병도의 연구에 수렴됨으로써, 한국 고대사 체계의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오영찬, 「조선후기 고대사 연구와 한사군」, 《역사와 담론》 64, 2012, 2~3쪽). 송호정도 “이병도의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이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같은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컸다. 한편, 이병도의 고조선 및 한사군, 삼한과 관련된 역사지리 연구는 한백겸과 안정복, 특히 정약용 같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많이 고민하였던 내용을 바탕으로 수행되었다.”고 하였다(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2, 2011, 50쪽). 따라서 식민사학으로 계승되었다는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