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선도제천문화의 연구 현황-제천시설 분야(2)

여신상이 우하량 소도 제천지에서 발견된 데 비해 동시기 오한기 흥륭구의 일반 주거지에서는 도소 남신상의 파편이 발굴되었는데 복원 결과 인체의 1/2 크기로 반가부좌 수행좌의 형태로 나타났다. 머리는 틀어 올려 옥장식으로 마무리한 한민족 고유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두 손은 여미어 하단전을 감싼 반가부좌 형상에, 백회에 구멍이 뚫린 채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영가무도수행을 하는 형상은 선도수행을 하는 선인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이외에 2002년 우하량 제16지점의 중심대묘인 4호묘에서 옥인상(18.6cm)이 출토되었는데 인당혈(선도수행에서 중요한 혈자리) 표식이 있는 남신상의 형태였으며 옥으로 제작되어 중심대묘에 부장된 것으로 보아 매우 존귀한 존재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기 최고의 소도 제천지인 우하량 여신묘에서 인체 3배 크기의 수행좌의 모습으로 나타난 여신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동시기 중심대묘에 옥으로 만들어 부장된 남신상이나 일반 주거지에서 수행좌의 모습으로 발굴된 남신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료 7〉 홍산문화기 남신상 2종

                                          1. 오한기 흥륭구 출토 도소 남신상 2. 우하량 16지점 4호묘 출토 옥인상(玉人像)

정경희, 「홍산문화 여신묘에 나타난 ‘삼원오행’형 ‘마고7여신’과 ‘마고제천’」, 『비교민속학』 60, 2016, 124쪽.
정경희, 「홍산문화 여신묘에 나타난 ‘삼원오행’형 ‘마고7여신’과 ‘마고제천’」, 『비교민속학』 60, 2016, 124쪽.

 홍산문화시기는 한국 선도사서에서 적시하는 배달국시대인 만큼 최고 통치자이자 선인이면서 선도제천을 주관하던 환웅을 남신으로 바라보게 되며, 제천의 주관자로서 남신이 제천하던 신격을 여신 곧 마고삼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민속문화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생명신이자 창조의 신이 바로 ʻ하느님·삼신, 마고·삼신(할미)ʼ인데 이는 형체가 있는 인격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에너지를 뜻한다.

또 한국선도에서는 마고제천의 집전자였던 환인·환웅·단군 삼성을 선도수행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본래의 밝음을 회복한 당대 최고의 수행자(仙人, 師)이자(성통), 홍익인간·재세이화로써 나라를 다스린 군왕(공완)이며 성통·공완 후 최종적으로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에너지인 밝음과 하나 된 존재(조천)로 여겨왔다. 그중에서도 환웅은 ʻ스승왕(師王)ʼ이라 불리며 ʻ개천(開天)시조ʼ로서 존경을 받아왔는데 이는 배달국시대에 이르러 밝문화가 가장 널리 알려지고 문명이 크게 개화하였기 때문이다.

홍산문화기 남신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제천의 신격인 마고여신 외에도 제천을 주관한 사제 겸 통치자인 환웅을 존경하고 추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천을 주관하는 사제이자 통치자이면서 자신과 똑같은 조건 속에서 밝음을 회복한 존재인 삼성, 특히 환웅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점차로 숭배와 신앙으로 변하여 갔으며, 후대에는 제천의례가 삼성을 향사하는 삼성숭배 의식으로 보여지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와해된 이후 선도사상이 약화되고 중국의 삼교(三敎)가 들어오면서 제천의 신격 또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삼국시대 선·불 습합이 이루어지면서 삼성은 과거불이나 미래불로 전화하기도 하고 불교 사찰 내 삼성각류의 주 신격으로 변모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여말 선초 성리학의 도입으로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는 선·불 습합의 문화까지 배척되고 밀려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선도가 억압받고 배척받던 시대 상황 속에 한국선도 제천의 신격인 ʻ1기·3기ʼ, ʻ마고삼신ʼ은 잊히고 그와 동일시되어 존경받던 삼성마저 잊히게 되었다. 결국 제천의 목적인 ʻ밝음 회복ʼ의 의미 또한 사라지고 단군조선의 군왕이자 민족시조로 인식되던 단군에 대한 존경과 친근함만 남아서 단군숭배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산신숭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우주의 하늘(天)과 가까운 곳에서 수행하면 수행자 속의 ʻ천(1기·3기)ʼ의 각성이 더욱 쉽게 일어날 수 있기에 선도제천의례는 우주의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에서 행하여졌고 나아가 많은 선인들이 산에서 내려와서 다시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산신 숭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산신은 ʻ1기·3기ʼ, ʻ마고삼신ʼ의 후대적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며 후대 한국 마을제에서 행해지는 산신제의 원형적인 모습은 ʻ마고제천ʼ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조선시대에 와서는 제천 전통의 강고함에도 불구하고 국중대회 형태의 대규모 선도 제천의례인 연등회, 팔관회를 폐기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식 제천의례, 도교식 제천의례 할 것 없이 천(天)과 관련한 모든 종류의 제례를 폐기하였다. 이러한 제천의례의 전통이 국가차원에서 폐기되면서 민간차원에서 자율적으로 계승한 것이 ʻ성황ʼ을 중심으로 한 마을제(洞祭)이다. 원래 성황은 중국 도교의 성읍 수호신으로 고려시대 성황이라는 용어가 수입되었으나 중국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한국 마을제에서 모시는 수호신, 곧 산천이나 신사(성황당)에 모셔진 신이란 바로 고대 이래 선도 전통하의 ʻ1기·3기ʼ, ʻ하느님·삼신ʼ, ʻ마고삼신ʼ 또는 ʻ삼성ʼ이었던 것이다.

서낭(성황)은 고유의 ʻ서낭ʼ신과 외래 ʻ성황ʼ의 2종이 복합된 것인데 전자는 산신을 뜻하는 산왕(山王)에서 선왕으로, 다시 서낭으로 전음된 것으로 보며 후자는 송대(宋代)에 수용(水庸: 도랑 또는 해자)을 제(祭)한 것에서 비롯된 성황인데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 비슷한 발음과 기능을 가진 ʻ서낭ʼ 신앙을 한문으로 ʻ성황ʼ이라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혼용된 것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기록을 보더라도 19세기까지만 해도 ʻ선왕당ʼ이라고 불렀으며 마한 소도(蘇塗)의 유속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유동식은 마을제(동제)의 명칭을 지역별로 나누어 중부지방(경기, 충청)은 산신제, 동부 산악지대(강원, 충북, 경북)는 성황제, 남부지방(전라, 경남)은 당산제라고 하는 것에 착안하여 각 지역별 대상 신격을 각각 산신, 성황, 당산신으로 보고 이 세 신격은 다 같이 산신의 이명(異名)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국전통의 마을 수호신인 산신과 서낭은 고대 이래 선도 전통하의 ʻ1기·3기, 마고삼신ʼ 또는 ʻ삼성ʼ을 일컫는 것이다. 다만 산신이 산에 있다면 서낭은 좀 더 대중화한 형태로 민간 속으로 들어와 마을 어귀나 앞 뒤 고갯마루로 가깝게 내려온 경우라 볼 수 있겠다. 결국 선도제천의례가 민간화 되면서 제천의 신격인 ʻ1기·3기ʼ, ʻ하느님·삼신ʼ, ʻ마고삼신ʼ은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한 본질로서가 아닌 길흉화복을 가져다주는 인격신이자 기복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고삼신과 동일시되었던 삼성 또한 본래의 의미에서 멀어져 기복 신앙의 대상으로 저류화되었다.

이상에서 필자는 홍산문화 우하량 소도 제천지에서 제천의 신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여신묘(女神廟)가 발굴되고 반가부좌를 한 선도수행형 여신상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선도제천의 신격인 ʻ1기·3기ʼ, ʻ하느님·삼신ʼ, ʻ마고삼신ʼ이 수행형 여신으로 표현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 여신에 대해 제천을 주관하던 당대 최고의 선인이자 통치자인 스승왕 삼성에 대한 신앙이 생겨나 여신상과 비슷한 형태의 수행행 남신상으로 표현되거나 수행 표식이 있는 옥인상으로 표현되어 중심대묘에 부장되었음도 살펴보았다.

홍산문화에서 발굴되었던 여신상과 남신상을 통해 배달국시대 선도제천의 신격이 마고삼신-삼성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또 단군조선이 와해된 이후 선도사상이 약화되고 중국의 삼교(三敎)가 들어오면서 국가중심의 제천이 민간화됨에 따라 제천의 신격 또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는데 마고→삼성→단군→산신→서낭으로 변천되어 왔음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