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중사(中祀)를 지낸 5악 중 북악인 태백산의 천제단. [사진 태백시]
신라가 중사(中祀)를 지낸 5악 중 북악인 태백산의 천제단. [사진 태백시]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천(祭天), 국중대회(國中大會)는 점차 모습을 감춘다. 제천이라는 말보다는 제사(祭祀)로 기록된다. 삼국 시대의 제천의례를 대략 살펴본다.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제사에는 고구려·백제 제사와 제례는 분명치 못하다며 《고기》 및 중국 사서에 실린 것을 고찰하여 기록해두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사서 《후한서》를 인용한 내용을 보면 “고구려는 귀신(鬼神)·사직(社稷)·영성(零星)에 제사지내길 좋아한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지내면서 크게 모이니,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는 대혈(大穴)이 있어 수신(禭神)이라 부르는데, 역시 10월에 맞이하여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귀신(鬼神)·사직(社稷)·영성(零星)에 제사지내길 좋아한다”는 부분을 제외한 다른 내용은 《삼국지》<위서> ‘동이전’의 내용과 동일하여 어느 시기부터 귀신(鬼神)·사직(社稷)·영성(零星)에 대한 제사도 지내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영성(零星) 제사는 진일(辰日)에 동남쪽에서 진성(辰星)을 제사하는 것으로 영성은 농사를 맡은 별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고구려 제사에 관한 《고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 및 산천에 제사지낸다(又云, 髙句麗, 常以三月三日, 㑹獵樂浪之丘, 獲猪·鹿, 祭天及山川)”고 하였다.

이는 《삼국지》 <온달전>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였는데,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자, 왕이 사냥을 나갔고, 여러 신료와 5부의 병사가 모두 따랐다(髙句麗常以春三月三日, 㑹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従). 고구려는 3월과 10월에 제천(祭天)을 했고, 10월에는 거국적인 국중대회를 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는 신대왕 때부터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시조묘 제사에 대한 《고기》의 기록을 보면 “신대왕 4년(168) 가을 9월에 졸본에 이르러 시조묘(始祖墓)에 제사지냈다”(新大王四年秋九月, 如卒夲, 祀始祖廟)”는 기록이 있으며, 고국천왕 원년(179) 가을 9월, 동천왕(東川王) 2년(228) 봄 2월, 중천왕(中川王) 13년(260) 가을 9월, 고국원왕(故國原王) 2년(332) 봄 2월, 안장왕(安藏王) 3년(521) 여름 4월, 평원왕(平原王) 2년(560) 봄 2월, 건무왕(建武王) 2년(619) 봄 4월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故國川王元年秋九月, 東川王二年春二月, 中川王十三年秋九月, 故國原王二年春二月, 安臧王三年夏四月, 平原王二年春二月, 䢖武王二年春四月, 並如上行)”

고구려는 제천과 함께 시조묘 제사를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 천지제사를 함께 거행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고기》에 이르기를 ‘온조왕(溫祚王) 20년(2) 봄 2월에 단을 세우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温祖王 二十年春二月, 設壇祠天地)’고 하였고, [온조왕(溫祚王)] 38년(20) 겨울 10월·다루왕(多婁王) 2년(29) 봄 2월·고이왕(古尓王) 5년(238) 봄 정월·[고이왕(古爾王)] 10년(243) 봄 정월·[고이왕(古爾王)] 14년(247) 봄 정월·근초고왕(近肖古王) 2년(347) 봄 정월·아신왕(阿莘王) 2년(393) 봄 정월·전지왕(腆支王) 2년(406) 봄 정월·모대왕(牟大王) 11년(489) 겨울 10월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천지제사에 관해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백제는 천제사만 단독으로 지내지 않고 천지를 함께 제사하사는 합제(合祭) 형태로 제사하였으며, 제사를 지낼 때는 남쪽에 큰 단(大壇)을 세워 거행했으며, 산천에 대한 제사도 함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박미라, ‘삼국.고려시대의 제천의례와 문제’)

또 “백제의 제천의례에서 주목할 점은 ‘정월’에 ‘남단’에서 ‘천(지)’를 제사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남단은 남쪽의 단을 가리키는 것이고 남쪽에 세운 단에서 천을 제사했다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유교 경전인 《예기》에 의하면 천은 양(陽)에 속하므로 양의 방위인 남쪽에서 천을 제사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역대 중국 왕조에서는 수도의 남쪽 교외(南郊)에 단을 쌓고 천을 제사하였고 백제도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제사의 시기도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한 대(漢代) 이후 중국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는 시기는 유교 경전인 《예기》와 《주례》를 근거로 동지와 정월의 두 시점으로 압축되었고 특히 정월에 제사할 때에 천지를 함께 제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백제 역사 이와 마찬가지로 정월에 천지를 합사하는 형태로 제사를 거행한 것이라고 본다.

《삼국사기》에 신라의 제사 기록을 보자.

“신라의 종묘(宗廟)의 제도를 살펴보면, 제2대 남해왕(南解王) 3년 봄에 처음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묘당을 세워 사계절로 제사지냈는데 친누이 아로(阿老)에게 제사(祭祀)를 주관하게 하였다.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은 시조가 탄생한 땅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세워 제사지냈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와서 처음으로 오묘(五廟)를 정했는데 미추왕(味鄒王)을 김씨 성(金姓)의 시조로 삼았고,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다고 하여 모두 대대로 헐지 못하는 신주로 삼고, 여기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친묘(親廟) 둘을 더하여 오묘로 하였다. 제37대 선덕왕(宣德王) 때에 이르러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

이를 보면 신라는 시조묘와 신궁(神宮) 제사, 오묘 제사, 사직단 제사가 있었다. 오묘에서는 1년에 6차례 오묘(五廟)에 제사지내는데, 정월(正月)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15일이었다.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을 감안하면 신라는 유교예법에 의해 제사제도를 정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사전(祀典)》에 나타난 바로는 국내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면서도 하늘과 땅에는 미치지 않았다. 이는 아마 《예기》 <왕제(王制)>편에 ‘천자는 7묘요, 제후는 5묘이니 2소(二召)와 2목(二穆)에다 태조의 사당을 더해 5묘이다’라고 하였고, ‘제후는 사직과 그 국내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했으므로, 감히 예법의 분수에 넘치는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신라는 또한 “3산 5악 이하의 명산과 대천을 나누어 대·중·소사로 삼았다”

이를 보면 고구려나 백제는 제천의례나 천지제사가 거행되고 있던 것에 반해 신라는 당나라와의 사대적 관계로 인해 우리 고유의 천제사나 남단(남교)같은 제천의례를 폐지하고 제후국으로서의 산천제사를 위주로 사직을 비롯한 제사를 거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박미라, ‘삼국ㆍ고려시대의 제천의례와 문제’).

이렇게 보면 신라에서는 천지제사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궁의 주신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신궁의 주신이 조상신이 아니고 천지신인 바 신궁의 설치는 조상신인 박혁거세 숭배에서 벗어나 국가신인 천지신 숭배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천지신을 모신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는 국력의 신장에 따른 국가의식의 자주적 표현이었다는 것이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신라는 혜공왕 때부터 오묘를 정하고 선덕왕 때 사직단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제사체계에 의거해 신라의 사전체계를 정비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삼국을 국가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제천' '국중대회'에서 천지제사, 시조신 제사, 사직제, 산천제사 등으로 변천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