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대회(國中大會)’로 개최했던 한민족의 제천의례를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 선도(仙道)에서는 어떻게 보았을까? 선도에서 제천의례는 일차적으로 수행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대학교 교수의 논문 “한국선도의 수행법과 제천의례”에 따르면 가장 대표적인 선도수행법이자 선도의례가 바로 ‘제천의례’이다. 정경희 교수는 이를 ‘선도 제천의례’라고 부른다. 이 논문은 선도의 삼원사상으로써 선도 수행법을 풀이하며, 대표적인 선도수행인 제천의례를 삼원사상적 수행법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 논문을 토대로 선도에서 본 제천의례를 살펴보자. 

한국사의 시원에서 한국인들은 선도를 통해 인간과 우주를 인식하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찾아갔다. 정경희 교수에 따르면 선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한 본질로서의 정보의 차원(性) , 또 주인된 자리에서 정보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연결시키고 주재하는 氣에너지의 차원(命)까지 인식하고 체험하게 함으로써 삶의 실체를 명확히 알게 하고 또 더 나아가 삶에 분명한 지표를 제시하는 심오한 사상이자 수련법이다.

국학원은 10월 3일 단기 4355년 개천문화축제에서 개천대제를 봉행했다. [사진 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국학원은 10월 3일 단기 4355년 개천문화축제에서 개천대제를 봉행했다. [사진 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선도경전에 등장하는 삼원사상의 경우, 모든 존재에 三元(性·命·精 또는天·人·地)의 차원이 내재되어 있으며, 삼원을 1)一(모든 존재의 근본상태), 2)三眞(性·命·精: 모든 존재의 형상화되기 이전 상태), 3) 三妄(心·氣·身:존재가 현상계에서 개별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된 이후의 妄念의 세계), 4) 三途(感·息·觸: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이후의 상태가 어우러져 작용하는 상태), 5)三修行(止感·調息·禁觸, 삼도를 삼진 상태로 되돌이키기 위한 수행)의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선도수행은 자신 속에 내재된 삼진(性, 命, 精)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선도의 수행법은 자신 속에 내재한 삼진(三眞)에 대한 정성과 믿음을 기반으로 한 삼수행(三修行)으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 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고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도의 역사 속에 드러난 선도 수행법으로 가장 대표적인 선도수행법이자 선도의례가 바로 ‘제천의례’이다. 선도에서 제천의례는 일차적으로 수행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정 교수는 “자신속의 삼진에 귀의하는 것이 선도수행의 본질이라고 할 때 이러한 선도수행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그래서 가장 중요한 선도수행이 바로 제천의례이다. 또 원론적인 의미에서 선도의 모든 수행이 제천수행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고 했다.  

이러한 견해는 기존의 제천의례에 관한 인식과 매우 상이한 데 이는 한국사 속에서 선도의 비중이 크게 축소, 왜곡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먼저 한국 고대사 관련 기록을 싣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사서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의 삼교(도교, 불교, 유교), 그 중에서도 특히 유교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서술한 것들이다. 이들 사서의 편사자들은 자신이 입론한 사상의 입장에서 선도를 바라보았고 따라서 선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한국사 속에서 선도의 비중이 크게 축소, 왜곡된 까딹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도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이 사라졌으나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록들 중 하나가 바로 제천의례에 관한 것이다. 

정 교수는 “많은 사사들에서 한국 고대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의례로서 제천의례를 꼽고 있지만, 국외자로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머물러 선도적 수행이나 의례로서의 성격은 거의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부처를 보좌하는 존재인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 의식으로,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귀신에 복을 비는 음사(淫祀)로 선도 제천의례를 오해하였다. 특히 유교적 관점에 의하면 선도 제천의례는 귀신(鬼神)을 제사하는 것으로 天君을 매개하여 소도(蘇塗)에서 이루어지며, 國中大會로서 연일 음주가무하는 방식이었다고 하였다. 

정 교수는 “이들 기록들이 제천의례의 선도수행으로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이 제천의례가 중국 삼교의 그것과 상관없는 한국 고유의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며 “한국 제천의례는 얼핏 보아도 중국 도교나 유교의 그것과 다르다. 무엇보다 선도 제천의례가 지배층, 피지배층이라는 계층 차이를 넘어서 공동체의 구성원이 함께 보인 자리에서 축제적인 방식으로 어우러진 점은 도교식 초제(醮祭)의 기복적인 모습, 또는 유교식 천제가 지배층을 중심으로 극히 엄숙한 방식으로 치루어진 모습과 다름을 한눈에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논문에서 정 교수는 선도 제천의례에 대한 오해는 서구적 가치관에 입각한 근대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선도를 단순히 인간의 이성이 개발되기이전 원시고대사회의 샤머니즘적 전통하에서 나온 주술적인 미신으로 이해할 뿐이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제천의례는 단지 원시농경사회의 사회적 필요에 의한 공동체 의례정도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공식적인 제천의례가 대체로 春·秋에 정례적으로 설행된 점에서 농경사회의 봄 기곡제(祈穀祭), 또 가을의 추수감사제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 제천시에 항상 음주가무(飮酒歌舞)가 따르는 것으로 보아 농경공동체의 단합을 위한 농경축제적인 의미의 것으로 해석하고 더하여 원시농경사회에서 자연조건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기복적인 차원의 의례로 해석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태백산문화원은 10월 3일 오전 11시 태백산 천제단에서 단군기원 4355년 태백산 천제 를 봉행했다. [사진 태백산문화원]
태백산문화원은 10월 3일 오전 11시 태백산 천제단에서 단군기원 4355년 태백산 천제 를 봉행했다. [사진 태백산문화원]

 

반면 仙道史觀에 의한 仙道史書인 《부도지(符都誌)》나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에서는 제천의례를 가장 핵심적인 선도수행의 꽃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선도사서들 중에서도 선도의 시원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符都誌》에서는 선도의 뿌리를 존재의 궁극원리인 율려(律呂)로까지 소급하고 그 연원이 황궁족(黃穹族)-유인씨(有因氏)-환국(桓國)-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黃穹族과 有因氏를 거쳐 桓國으로 이어진 선도의 맥이 선도수행법으로써 본격적으로 펼쳐진 시기는 신시배달국시대부터였다. 곧 선도의 성인으로 桓國의 선도를 이어 신시배달국을 개창한 환웅(桓雄)은 이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선도로써 사람들을 교화하기 시작하였다. 선도에서 배달국시대를 ‘敎化의 시대’로 일컫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삼국유사》 왕검조선조(王儉朝鮮條)에 "天帝의 子 桓雄이 神市를 베풀어 弘益人間, 在世理化하였다"는 기록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선도의 가르침이 펼쳐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선도교화가 시작되면서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와 같은 선도경전이 비로소 등장하기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선도수행법으로서 선도 제천의례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제천수행이 개인적이거나 소집단 규모의 것에서 벗어나 국가나 사회적인 차원의정기적 의례로서 公共化될 때 형식, 시기, 장소 등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특히 시기면에서는 현실의 삶에서 중요한 農政과 관련하여 정기적인 농경의례로 자리잡게 되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정형화된 틀이 필요해지게 된다. 장소면에서도 여러조건들을 따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선도의 수행법과 제천의례”에 따르면 정기적인 공공의례로서 설행된 제천의례의 경우, 시기면으로는 신시시대 이래 10월 중에 정기적 으로 설행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매년 봄·가을 양차에 걸쳐 거행되었는데, 봄·가을 제천의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2대 단군 부루(夫婁)때부터 시작되고 있다. 곧 이때에 이르러 매년 봄·가을로 國中을 두루 돌면서 祭天하였다고 한다. 봄·가을 제천 중 가을 제천의 경우는 10월로 고정이 되었지만,봄 제천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단, 봄 제천의 경우 3월인 경우가 다수 산견(散見)된다.

장소면으로는 많은 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곳에 둥근 모양의 祭天壇(圓壇)을 쌓는 방식이었는데, 선도의 제천단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은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태백산(太白山), 장당경(藏唐京), 황해도 염주(鹽州)(지금의 연백군) 동쪽의 氈城, 황해도 구월산 四王寺 근처, 평양의 箕林窟 등이다. 이중에서도 마니산이 가장 저명하다. 마니산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군이 祭天한 장소로서 알려진 참성단(塹星壇) 유적이 남아있는데, 고조선이래 조선전기에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에서 선도제천의례를 행하였다.

형식의 면에서는 國中大會의 성격으로 치루어졌다. 국중대회는 진지하고 신성한 수행으로서의 측면과 수행의 기쁨을 표현하는 오락적인 측면, 양측면을 모두 갖고 있었다. 제천의례를 통한 수행을 마친 후에 國人들은 음주·가무를 통해 수행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民氣가 진작되었고, 공동체성원으로서의 소속감 또한 공고해져 정치·사회적인 면에서도 큰활력소가 되었다. 

정경희 교수는 “간혹 유교사서에서 祭天을 단지 ‘연일음주가무’하는 방식으로 묘사한 것은 선도수행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국외자의 입장에서 눈에 쉽게 들어오는 오락적인 부분만을 기록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선도의 맥이 끊어지게 된 것을 정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류 역사의 시작 이래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갈수록 현상(精)의 세계에 치중하여 갔다. 본질로서의 정보의 차원(性)이나 氣에너지(命)의 차원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자, 현상을 상대화하고 감각을 배제해야만 인식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감각을 쫓아 현상에만 몰두하여 갔다.

이러한 변화에 선도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게 되었고 급기야 고조선사회를 기점으로 선도의 맥은 끊어지게 되었다. 현상을 중시한 사상으로 중국의 도교와 유교가 적극 수용되었으며, 선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는 불교도 수용되었다.” 

이처럼 제천의례는 가장 대표적인 선도수행법이자 선도의례였다.  이 선도수행법으로서 제천의례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오해를 없애고 그 원형을 회복하고 이를 계승할 필요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