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들어 제천의례는 본격적으로 유교식으로 바뀐다.

《고려사》 ‘세계(世系)’에는 성종 2년(983) 정월에 왕이 친히 원구(圓丘)에 제사하여 곡식의 풍작을 기원했는데 태조의 신위를 하늘에 배향하였다. 이것이 고려 제천의례의 최초 기록으로 이때부터 기곡제(祈穀祭)가 시닥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려사》에는 제천의례를 거행한 기사가 12건 수록되어 있다.

고종황제 때 설치한 환구단. [사진 K스피릿 DB]
고종황제 때 설치한 환구단. [사진 K스피릿 DB]

원구는 고려의 국가제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사로 연 2회 거행되었다. 정월 첫 신일(上辛)에 원구단에서 기곡제를 지내고, 4월에는 길일을 택하여 우제(雩祀)를 지냈다.

원구단은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인데 개성 회빈문(會賓門) 밖에 있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수도의 남쪽과 북쪽 교외에 원구와 방택을 세워 천지를 제사하였는데, 고려도 이를 따라 제천의례를 거행한 것이다. 고려는 중국의 천자의 예제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원구단의 크기는 중국의 원구단과 비교하면 1/6정도였고, 층수도 4단이 아닌 1단이었으며 왕의 제복이나 음악도 천자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의 왕들은 여러 차례 명산대천의 신들에게 덕호(德號)를 하사하였는데, 이 또한 천자의 예제에 의한 것이다. 중국 천자의 예제에 따르면 제후의 나라에서 산천에 봉작을 내려줄 수 없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르면 이는 고려가 중국의 제천의례를 받아들였지만, 자신들의 필요와 이해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박미라, “삼국·고려시대의 제천의례와 문제”).

고려는 의종1년 7월에 왕이 친히 회경전(會慶殿)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태조에게 비를 기원하는 제천을 하였다. ‘호천상제’는 유교적 제천의례에서 천(天)의 신위에 표식한 호칭이다. 연구자에 따르면 회경전은 대궐의 전각으로 이곳에서 호천상제에게 드린 제천은 원구나 교에서 드리는 유교적 제의가 아니고 도교의 초제(醮祭)로 보인다(금장태, “제천의례의 역사적 고찰”).

또한 고려시대에는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단군(단군) 숭배 의식이 왕성하게 일어나 황해도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삼성사를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 강화도 마니산의 성단도 단군신앙과 연결된 제천의례가 거행되는 곳이었다. 원종5년(1264) 6월 원종이 마리산 참성(塹城)에서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고려시대의 제천의례는 유교적 원구제도를 통해 확고하게 정립되며, 다른 한편으로 도교적 초제로서 왕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시행되는 이중적 형태이면서 동시에 상호 보완적 기능을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대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 원구단을 원구단을 세워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오방오제(五方五帝 : 東方靑帝·西方白帝·南方赤 帝·北方黑帝·中央黃帝)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념에서 원구단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거세지면서 이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태종 16년 6월에 변계량이 원구단 폐지 반대 주장을 하기도 했다. 변계량은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고친 적이 아직 없었으며, 태조가 이를 따라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폐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제후국으로서 기우를 목적으로 제천하자는 논의가 전개되어 세종대까지 호천상제와 오제만은 대신이 섭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종 25년 이후로 제천에 관한 옛 제도 연구가 심화되면서 제후국으로서 제천의례는 참람하다고 하여 원구단은 폐지되었고, 대신에 우사단에서 기우제만을 지냈다.

세조대에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하였다. 이는 잠시 집권 초기 사육신 사건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왕권의 이념적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조 이후 원구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기에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소공동에 원구단(환구단)과 황궁우(皇穹宇)를 세워 본격적인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천자로서 제천의례를 거행하였다. 원구단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祇), 그밖의 북두칠성, 오악(五嶽), 사해(四 海) 등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황궁우에는 황천상제, 황지기와 짝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신위를 모셨다. 원구단에서는 동지(冬至)에 제천의례를 지내고, 정월 상신(上辛)에는 기곡제를 지냈다.

1902년에는 고종황제의 즉위 40년을 경축하기 위해 석고단(石鼓壇)을 세웠다. 그러나 원구단 제사는 1908년에 간소화되어, 1월의 원구단 대제는 종묘, 사직과 함께 1인이 3헌관을 겸하게 되었고, 7월에는 1년에 2차로 축소되었다. 대일항쟁기에는 국가를 상징하는 원구단 제사가 폐지되어, 원구단과 그 부지는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1914년에는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세워, 현재 황궁우와 석고단만 남아 있다.

조선이 유교와 사대에 의해 천제를 하지 않음에 따라 민간에서 천제의례를 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태백산 천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