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지식이 부족했던 고대 인류에게 변화무쌍한 자연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간의 길흉화복이 천지자연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제물을 갖추고 제사를 올렸으니 하늘에 올리는 천제(天祭), 땅에 드리는 지제(地祭), 산천에 올리는 산천제(山川祭)가 그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사를 올리는 데는 한민족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개천절을 맞이하여 여러 제사 가운데 한민족이 하늘에 올리는 천제의 역사를 살펴보며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되새겨보자. 

일찍이 우리 민족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으며, 그 유적이 지금도 전해온다. 바로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이다. 참성단은 국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세종실록》 〈세종지리지〉 마리산(摩利山)에 관한 설명에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마리산)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예로부터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어 초제(醮祭)를 지내었다. 금상(今上, 세종) 12년 경술에 비로소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재궁 벽 위에 ‘동(東)’자 운(韻)의 시(詩)가 있으니, 태종(太宗)이 잠룡(潛龍) 때에, 일찍이 대언(代言)이 되어서 이곳에서 재숙(齋宿)할 때 이 시를 지은 것인데, 지금 널에 새기고 금으로 메웠다.

고려시대에 참성단에서 올리던 천제를 조선 초기에 그대로 이어받았고, 고려시대 정3품 대언을 보내던 것을 세종 12년(1430)에 격상하여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냈다. 그만큼 참성단 천제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은 국조 단군이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사진 K스피릿 DB]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은 국조 단군이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사진 K스피릿 DB]

 단군 조선 이후에도 천제는 이어졌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는 부여, 고구려, 예, 한의 제천의례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부여전을 보면 부여의 제천의례는 영고이다.

“은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이름하여 영고라 하였다. 이때에는 형옥을 판단하고 죄인의 무리를 해결하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원문 해석은 최광식,《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한길사, 1994)를 따랐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은정월은 음력 12월의 이칭으로 이때의 제천행사를 수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에서 하는 제사대상은 하늘이며 규모로는 국중대회(國中大會) 즉 나라 전체가 함께하는 행사였다. 부여는 영고가 아니어도 천제를 지냈다. 바로 전쟁 때이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이러한 부여의 제천의례에 관해 최광식은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한길사, 1994)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부여는 군왕이 있어 매년 은정월(殷正月)에 수렵의례로서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였으며, 이를 통해 왕권을 과시하였다. 며칠간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경제력을 장악하여 재분배하였으며 이때 법률을 집행하고 전쟁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제천의례를 거행하여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군주는 추종자들이나 민으로 하여금 자신을 천신과 교감하는 존재로 보이게 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천자의 설화를 낳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고구려 제천의례 관련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10월에 제천을 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중대회는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이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국중대회, 즉 거국적인 대회이며 그 제의의 이름이 동맹이다. 또한 《삼국사기》 32, 제사지를 보면 고구려는 또한 매년 3월 3일(삼짇날) 낙랑의 언덕에 모여 수렵을 하여 돼지와 사슴을 찾아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예(濊)에서는 제천의례를 10월에 하여 고구려와 시기가 같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삼국지》 <위서> ‘동이전’)

제천 때에는 밤낮으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이는 부여와 삼한과 동일하다. 그런데 최근 돈황문서에 이 예의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魏略曰 :鮮之俗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이라는 기록이 보고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윤용구, "소그드벽화, 호레즘성곽, 돈황문서에 보이는 고구려 자료" 제85회 정기발표회(한국고대사학회, 2005)). 이에 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예에서는 호랑이를 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는 것이 특징이다. 최광식은 《삼국유사》 단군왕검조에 나오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가 조선의 동쪽 예에 나타나 호신으로 숭배받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서 단군왕검의 사회형성에 관여하지 않은 호신을 숭배하는 집단이 동쪽으로 갔다고 가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고 주목했다.

마한, 진한, 변한, 즉 삼한에서도 제천의례가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中國의] 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삼한에서는 천군이 국읍에서 세운 천군이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초기 사회에서는 제정일치(祭政一致)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사회가 세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정치인과 사제(司祭)가 임무를 나누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제가 천군이 되었다. 국가에서 하는 제천의례를 전문적으로 하는 제사장인 셈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는 고유의 제천의례를 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