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교학을 대표하는 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신화는 신성한 시작의 역사”라고 했다. 창세(創世)신화는 이 세계와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밝히며, 시조(始祖)신화는 한 민족 또는 씨족의 시작, 건국(建國)신화는 한 나라의 기원을 신성하게 설명한다.

신시배달국과 고조선 건국일인 개천절을 축하하는 사단법인 국학원 기념행사. [사진 K스피릿 DB]
신시배달국과 고조선 건국일인 개천절을 축하하는 사단법인 국학원 기념행사. [사진 K스피릿 DB]

현대에 사는 우리는 신화의 시대를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화는 수많은 문학과 예술의 모티브가 되었고 철학과 종교는 신화에 대한 일정한 이해 위에서 비로서 해석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의학용어는 물론 천체를 향해 쏘아 올리는 우주선의 이름, 그리고 마블 히어로와 같은 현대적인 창작물도 신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특히, 건국 신화는 나라를 세운 건국 세력의 세계관과 이를 자신들의 건국이야기로 꾸준히 전승해 온 민족의 특성과 계통을 나타내며, 고대 부족의 결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을 해석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신화가 역사 자체는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하나의 문화적 그릇이자 역사적 사실을 신비화시키는 상징의 힘을 지닌 사료(史料)가 되기도 한다. 개천절을 맞아 몇몇 건국 신화를 살펴본다.

일본의 ‘건국기념의 날’은 신화 속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의 즉위일

일본 신화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와 그의 남동생으로 갖가지 말썽을 부린 폭풍의 신 수사노오가 황천국에서 돌아온 이자나기에게서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일본의 건국신화를 그린 그림. [사진 K스피릿 DB]
일본의 건국신화 속 천손강림. [사진 K스피릿 DB]

아마테라스의 손자 호노니니기가 옥돌과 거울, 검 삼종신기(三種神器)를 맡은 신들과 함께 하강해 산의 신 오호야마츠미의 딸 고노하나노사쿠야비메와 결혼한다. 그때 산의 신은 언니인 이하나가히메도 함께 보냈는데 거절당했다. 이를 수치스러워 한 산의 신은 “언니에게 천손의 명(命)을 돌과 같이 영원하게 하는 기원을, 동생에게 천손 번영의 기원을 담았는데 언니를 거절했기 때문에 번성하겠지만 끝은 유한할 것”이라고 했고, 이 때문에 신의 자손인 천황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호노니니기와 고노하나노사쿠야비메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 중 막내 호오리가 형의 낚시바늘을 바다에서 잃어버렸다가 바다를 다스리는 와타츠미의 궁을 찾아가 낚시바늘을 되찾고, 와타츠미의 지혜로운 딸 도요타마비메와 결혼한 후 형을 항복시켰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장해 이모 다마요리비메와 결혼해 둘 사이에 초대 신무천황이 태어났다.

일본이 기념하는 ‘건국기념의 날’ 2월 11일은 일본 신화 속 초대 천황인 친무천황이 즉위했다는 날짜를 ≪일본서기≫를 근거로 산출한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에는 선조가 천손으로 지상에 내려왔다는 천손강림 사상, 영웅적인 인물의 비범한 능력을 설명하는 갖가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뉴질랜드, 태양을 천천히 지나가게 하고 낚시대로 바닷속 섬을 끌어올린 마우이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우리의 전통춤. [사진 K스피릿 DB]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우리의 전통춤. [사진 K스피릿 DB]

뉴질랜드에는 호기심 많은 악동이자 기상천외한 모험에 계속 도전해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유쾌한 영웅 마우이의 이야기가 전한다. 할머니 신에게서 강력한 무기가 되는 보물을 얻은 마우이는 너무 빨리 하늘을 지나가는 태양 라를 신묘한 밧줄로 잡아 천천히 하늘을 지나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덕분에 인간은 밭을 만들어 작물을 재배하고 충분한 낮시간을 갖게 되었다.

또한, 형들의 배에 몰래 올라 먼 바다 깊은 곳에서 ‘찾아 헤매던 육지’라는 뜻을 가진 물고기 하하우 호에누아를 끌어올렸다. 최후의 모험으로 잠자는 죽음의 여신 몸속을 통과하려 했으나 실패해 인간에게 영원한 삶을 주고자 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현재 뉴질랜드에서는 1840년 2월 6일 와이탕이에서 영국인과 마오리 추장들이 조약을 체결한 ‘와이탕이 데이’를 건국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외에도 나라마다 다양한 건국 신화가 있다. 예를 들면 베트남에는 용신인 아버지 락롱꾸언과 산의 선녀인 어머니 어우꺼 사이에 알에서 태어난 100명의 아이들과 나라를 세운 장남 훙브엉이 건국한 신화가 전하고, 매년 음력 3월 10일을 ‘시조의 기일’로 정해 기념한다. 

북유럽 핀란드에는 ‘칼레바의 나라’를 노래한 영웅서사시 ‘칼레발라’ 신화가 전하는데 19세기 이후 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핀란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헝가리의 알모시 신화에는 1000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각국 건국 시조들의 영웅다운 삶을 노래함으로써 왕조를 정당성, 신성성을 밝히고 한 민족의 원초적인 세계관과 민족문화의 정체를 밝히는 소중한 정보가 들어있다.

그런데 한민족의 단군신화는 남다르게 나라를 세우는 이상(理想)을 ‘홍익인간’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고조선의 건국일이자 대한민국의 생일 개천절을 축하하는 국학원 주최 광화문 퍼레이드. [사진 K스피릿 DB]
고조선의 건국일이자 대한민국의 생일 개천절을 축하하는 국학원 주최 광화문 퍼레이드. [사진 K스피릿 DB]

홍익인간의 대업으로 고조선을 세운 단군, “우리는 아직도 고조선의 사람들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를 살펴보면, 초월적 능력을 지닌 환웅은 전지전능한 역량으로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로 내려와 베풀고 가르치며 성취를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웅녀는 높은 이상을 이루기 위해 동물적인 본능을 누르고 역경 속에서도 규범을 지켜내는 수행을 통해 마침내 자기 성취를 이루고 사람으로 비약한다. 단군은 나라를 세워 홍익인간의 이상을 펼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의 세계관을 실현하는 역할을 한다.

홍익인간은 ‘나’라는 개인 중심이 아니라 내가 포함된 ‘우리’라는 공동체 중심의 이로움을 도모하는 공동체적 세계관을 나타낸다. 그것이 ‘내 집, 내 어머니, 내 아내’가 아닌 ‘우리 집, 우리 어머니, 우리 아내’와 같이 ‘우리’라는 표현 속에 잠재되어 있다.

민속학 연구자 임재해 안동대 인문대학 학장은 “우리는 아직도 고조선의 사람들이다”라고 한다.

그는 “헌법 전문에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이 해석학적으로 표방되어 있고 교육기본법 제1조에 단군의 이념이 교육목적으로 명문화되어 있다. 또한, 우리 국민 모두 개천절을 국경일로 맞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다”라며 “우리는 단군의 가르침을 알게 모르게 착실히 받고 있으며 단군신화의 세계관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이 표방하던 이념들을 겨냥한 채 어느 정도 고조선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개천절은 4354년 전 단군왕검이 단군조선(고조선)을 건국하면서 홍익인간의 대업을 시작한 날이자, 그보다 1565년 앞서 신시배달국의 환웅천왕이 천명한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뜻을 계승한 날이다.

 

[참조]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임재해, 2006년, 민속원)
         ≪우리가 알아야 할 세계신화 101≫(요시다 아츠히코 외, 2005년, 이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