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제천신격의 변화로 본 선도제천문화의 민속·무속화(종교화)

3. 조선왕조와 민간의 ‘마고삼신-삼성’ 인식차

앞서 조선시대 유교례의 전적인 도입을 계기로 마고삼신-삼성의 본령이 천신(생명신·창조신)에서 산신으로 왜곡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조선왕조와 민간의 구체적인 마고삼신-삼성 인식에는 큰 격간이 벌어지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단군만을 역대시조중 일위로 내세웠지만, 민간에서는 상고 이래 차곡차곡 누적되어온 오랜 마고삼신-삼성 인식 위에 다시 새롭게 생겨난 산신 인식을 더하는 중층적 인식을 보였던 차이이다. 조선왕조의 마고삼신-삼성 인식이 유교례에 준거해서 선도제천문화를 통제해가는 이념적 방향이자 지도안이라면, 민간의 마고삼신-삼성 인식은 선도제천문화를 실제로 향유해가는 민인들의 현실적 삶속에서 적용 방식과 의미, 또 효용가치를 보여준다.

계속 살펴온 바와 같이 조선시대 유교례에 의거, 마고삼신-삼성은 천신이 아닌 산신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실제 국행 산천제의 신격은 산·천으로 표방되었으며, 마고삼신-삼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유교례에서 마고삼신-삼성은 철저히 무화되어 어떠한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유교례에서 마고삼신-삼성중 유일하게 공인된 존재가 단군이었다. 단군은 역대시조의 일위로 공인되었으나 과거 스승왕이나 제천의 신격으로서의 면모가 탈각되었고 천신에 대한 새로운 시대적 이름인 산신의 면모도 부여되지 않았다. 단지 역대시조의 일위이며 위격도 기자보다 낮은 존재였을 뿐이다. 요컨대 조선왕조는 공식적으로 마고삼신과 환인·환웅을 무화하였고 단군만을 역대시조의 일위로 공인하되 스승왕 · 제천신격 · 산신과 같은 사상·종교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였다.

이는 상고 이래의 오랜 역사 전통과 배치되는 방향이었기에 민간사회로 전적으로 수용될 수 없었다. 전통과 관습은 잘 바뀌지 않는 속성이 있어 민간에서는 상고 이래의 마고삼신-삼성 인식 위에 새로운 산신 인식이 덧씌워진 중층적인 방식으로 인식하였다. 이중적 기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민간의 마고삼신-삼성 인식은 마을의 마을신, 또 가가호호의 집안신에 잘 나타나있다.

먼저 마을신이다. 동북아 상고 이래 선도제천문화에서 신격은 오로지 마고삼신-삼성으로 이는 지역단위로 행해졌던 마을제천(훗날의 마을제)의 신격이기도 하였다. 마을제천은 마을의 중심 제천시설에서 행해졌고 이 중심 제천시설이 신격과 동일시되는 구조였기에 마을의 중심 제천시설이 중요해진다. 이러하므로 일차적으로 선도제천문화의 원형기인 배달국시기의 대표 제천시설인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3층원단류)’가 마을의 제천시설로 면면히 이어졌던 면모부터 살펴보게 된다.

배달국시대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의 일차적인 계승 형태는 청동기~초기철기시기의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선돌 · 고인돌 · 적석단 · 나무솟대 · 제천사류)’이다. 그 기본 구조는 배달국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시대변화를 반영하여 중심 제천시설이 배달국시대의 ‘3층원단류’ 외에 ‘적석단 · 선돌 · 고인돌 · 나무솟대 · 제천사류’ 등으로 다변화되었던 차이가 있다. 곧 탁트인 전망을 지닌 나즈막한 산구릉지 정상 부위에 적석단 · 선돌 · 고인돌 · 나무솟대 · 제천사 등의 제천시설이 있고 주변으로 환호가 둘러진 형태이다.(환호는 생략되기도 한다.) 이는 산구릉지 아래의 일반 주거지와 구별되는 신성구역으로『삼국지』위지 동이전 한(韓) 조항에 나오는 제천의례 또는 천신의례가 행해진 소도제천지였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는 다시 달라져갔다. 위치 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산구릉지 위에 위치한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 아래로 내려온 경우도 많았다. 중심 제의시설도 기왕의 ‘적석단 · 선돌 · 고인돌 · 나무솟대 · 제천사류’ 외에 ‘적석단(성황단·서낭단), 성황당(서낭단, 구 제천사), 선돌, 나무솟대, 당목, 장승’ 등으로 좀 더 다양해졌고 호칭도 달라져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는 작아졌고 중심시설도 영세화하는 경향이었다.

마을제 시설이 ‘성황(城隍) 또는 서낭’으로 불리게 된 점도 중요하다. 원래 성황은 중국의 도교·유교문화에 나타나는 마을신으로 고려 중기 이래 한국사회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사회에 도입되었다. 특히 조선왕조에 들어 유교례를 전면 수용하면서 성황제가 지역사회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을 곳곳에 자리한 소도제천지가 성황으로 불리게 되었고 훗날에는 서낭과 혼칭되었다. 조선시대 국가 차원의 국중제천이 포기되면서 성황·서낭으로 불리는 마을제천이 상고 이래의 제천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유교문화의 성행과 선도문화의 쇠퇴 추세 속에서 마을제천은 점차 형식과 내용면에서 선도제천의 원형에서 멀어져갔고 현대 한국사회의 마을제문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사회의 마을제문화를 살펴보면, 드물게 ‘천제(天帝)’라는 이름과 형식을 고수해 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내용면에서 선도제천문화의 원형을 잇고 있지는 못하다. 대부분의 마을제는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선도제천문화의 원형에서 멀어져 단순 공동체 의례의 차원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면모는 마을제의 신격 부면에 잘 나타나 있다. 마을제 시설의 신격에서 마고삼신-삼성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 이름과 의미가 잊혀져 실체가 모호한 ‘할머니신-할아버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른 바 ‘할머니신-할아버지신’은 실체가 모호한 인격신이자 부부신으로 오인되기도 하나 조금만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시간의 흐름속에서 ‘마고삼신-삼성’이 흐릿해진 모습임을 알게 된다.

마을제 시설의 신격은 선돌·고인돌과 같이 오래된 제의시설일 수록 삼성(할아버지신)류 보다는 마고삼신(할머니신)류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거대한 선돌·고인돌의 경우 ‘마고삼신바위, 칠성바위(마고삼신은 북두칠성 근방의 하늘에서 시작된 근원의 생명에 대한 상징이기에 칠성신이기도 함)’로 불리며 마고(삼신)할미 전승이 덧붙여진 경우가 많았다. 배달국시기의 적석(積石)형 제천시설, 또 단군조선시기의 거석(巨石)형 제천시설이 근간이 되어왔던 전통의 선상에서 이해된다.(<자료12-1>) 마을 성황당(서낭당)의 신격으로, 화상으로 제작된 마고삼신이나 여성 삼신제석(삼불제석)화도 많다. 고인돌·선돌형의 마고삼신에 비해 훨씬 후대적인 형태이다.(<자료12-2>)

<자료12> 마을신으로서의 마고삼신(할머니신)

1:좌로부터 포항 성계리 칠성바위, 포항 문성리 마고할미바위, 옥천 석탄리 선돌, 2: 구파발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삼신화, 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삼불제석화. [사진 정경희]
1:좌로부터 포항 성계리 칠성바위, 포항 문성리 마고할미바위, 옥천 석탄리 선돌, 2: 구파발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삼신화, 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삼불제석화. [사진 정경희]

 

마고삼신(할머니신)류 외에 삼성(할아버지신)류도 있다. 삼성(할아버지신)류 중에서, 삼성의 원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례로 ‘환웅’ · ‘왕검’ 명문이 각각 새겨진 전북 부안군 월천리 석장승 2기, 또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진 삼성화를 들어보게 된다.(<자료13>)

<자료13> 마을신으로서의 삼성(할아버지신)

(사진 왼쪽부터)1. 월천리 환웅·왕검 명문의 석장승 2기 2. 구월산 삼성사내 삼성화. [사진 정경희]
(사진 왼쪽부터)1. 월천리 환웅·왕검 명문의 석장승 2기 2. 구월산 삼성사내 삼성화. [사진 정경희]

 이외에 마고삼신(할머니신)과 삼성(할아버지신)이 쌍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고삼신-삼성의 원의미와 관계가 잊혀지면서 부부신으로 오인된 결과이다.

이처럼 고래의 마을제천을 계승한 마을제의 신격은 마고삼신-삼성의 원형에 근접한 경우도 있었지만 할머니신-할아버지신으로 모호해진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돌·고인돌과 같이 오랜 제의시설일수록 마고삼신(할머니신)류인 경우가 많아 훗날 삼성(할아버지신)류의 우세 속에서도 과거 선도제천문화의 흔적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집안신이다. 마을신은 집안신이기도 하였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집집마다 쌀을 가득 채운 바가지나 단지 또는 자루를 시렁 위에 올려두고 풍요·다산·치병 등 각종 소원을 담아 치성을 올렸으며 매년 가을 추수때 마다 새롭게 천신(薦新)하였다. 이 집안신을 중심으로 10월에 흰 떡을 하여 고사를 올렸는데, 선도의 10월 제천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10월 고사 외에 명절, 생일, 조상제사, 추수 등 가정의 각종 기념일에도 집안신을 중심으로 의례가 행해졌다.(<자료14>)

<자료14> 집안신(삼신단지·부루단지)으로 나타난 ‘마고삼신-삼성(부루단군)’

[사진 정경희]
[사진 정경희]

집안신은 다양하게 불리었는데, ① 마고삼신 계통의 호칭: 삼신제석, 삼신, 삼신바가지, 삼신단지(제석단지), 삼신자루(제석자루), 삼신주머니(제석주머니), ② 삼성 계통의 호칭: 부루단지(부루는 왕검의 아들로 2대 단군임), ③ 성주 계통의 호칭: 성주(城主), 성조(成造), 성주(星主) 등이다. 호칭의 3계통 중에서도 ①삼신 관련 호칭이 가장 많고 다양하였던 점을 통해 마고삼신-삼성 중에서도 마고삼신이 집안신의 중심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호칭으로써 볼 때, 마을제에서 마고삼신-삼성이 할머니신-할아버지으로 불리면서 모호해졌던 반면 가정에서는 마고삼신-삼성의 원형이 좀 더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정리해보자면, 배달국 이래 선도제천의 신격적 원형이었던 마고삼신-삼성은 ‘근원의 생명-스승왕’의 의미였으나 훗날 유교의 도입 이후 유교례에 따라 제천이 폐기되면서 천신(생명신·창조신)에서 산신으로 왜곡되었다. 유교례 적용의 주체인 조선왕조에서는 제천의 신격인 마고삼신-삼성을 무화하였고 역대시조로서 단군만을 공인하였다. 여기에서 단군은 역대시조의 일위였을 뿐 스승왕이자 제천의 신격, 또는 산신이라는 사상·종교적 의미는 전혀 부여되지 않았으며 위격도 기자보다 낮았다. 반면 민간에서는 천신에서 산신으로의 왜곡이라는 추세 속에서도 오랜 마고삼신-삼성 전통을 이어갔다. 마을 단위에서는 과거의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을 인습한 제의시설을 중심으로 마을제가 행해졌는데, 고인돌·선돌과 같이 오래된 제의시설일 수록 마고삼신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마고삼신-삼성의 원형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할머니신-할아버지신으로 모호해진 경우도 많았다. 가정 단위에서는 마을 단위에 비해 마고삼신-삼성의 원형 보존 정도가 상대적으로 양호하였으며 마고삼신의 흔적이 가장 많았다.

이처럼 조선왕조와 달리 민간에서는 마고삼신-삼성이라는 선도제천문화의 신격적 원형의 흔적이 적잖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의 생명-스승왕’이라는 정확한 의미는 잊혀진 상태였으니, 이러한 면모는 선도제천문화의 본령인 천인합일 수행[성통] 및 홍익인간·재세이화적 실천[공완]의 양대 요소가 잊혀진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즈음 선도제천문화는 전반적인 민속·무속화(종교화) 추세 속에서 기복·기원의 종교의례로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