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 톺아보기]교양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야만성이다
[명저 톺아보기]교양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야만성이다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2-04-12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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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12)

1부 대중의 반역

8 대중은 왜 모든 일에 개입하고 그것도 폭력적으로 개입하는가(상)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 '8 대중은 왜 모든 일에 개입하고 그것도 폭력적으로 개입하는가'에서 먼저 대중의 반란이 평균인, 즉 대중의 자기폐쇄성에서 기인하며,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바로 대중의 반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오르테가가 논의하고자 하는바는 대중의 '지적 폐쇄성(hermetismo intelectual)'이다. 대중은 사전에 어떤 문제에 관해 충분히 생각하여 의견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그 문제에 관해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이들은 오르테가가 말하는 ‘반역하는 대중’이라고 부르는 어리석은 인간 유형에 속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다.

대중은 어떻게 지적 폐쇄성에 빠지는가? 오르테가는 자기 폐쇄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내면에 어느 정도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만족하면서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외부에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한정된 목록에 최종적으로 안주한다. 그것이 자기 폐쇄의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사상, 지식을 의미한다. 이런 폐쇄성을 갖는 대중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선택된 인간, 앞에서 말한 소수자, 우수한 소수자는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려면 특별한 허영심이 필요하다. 이 고귀한 인간은 심지어 허영심으로 눈이 먼 상태에서도 자기 자신이 진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시대의 평균인, 이 새로운 아담은 자기 자신의 완벽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선천적인 마음의 폐쇄성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인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잠시 자기 자신을 떠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균인은 이런 이동-최고의 스포츠를 할 수 없다.

대중과 선택된 소수의 이런 차이는 바보와 현명한 사람 사이에 영원히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고 말한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과 바보의 차이가 언제나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경계한다. 따라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지성은 바로 이러한 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 바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별력이 뛰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 안주해 있지만 부러울 만큼 평온하다. 마치 서식하는 구멍에서 곤충을 끌어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바보를 어리석음에서 끌어내어 암흑세상, 즉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자신의 멍청한 시각을 더 예리한 다른 시각과 대조해보게 할 방법이 없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그러나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즉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대중은 매우 영리하며 다른 어떤 시대의 대중보다도 더 많은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더욱 그를 폐쇄시켜서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대중은 항상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 쌓인 상투어와 편견, 지엽적인 생각이나 혹은 의미없는 말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을 천진난만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대담함으로 아무데나 들이댄다.”

이것은 1 밀집의 사실에서 오르테가가 우리 시대의 특징, 대중사회의 특징으로 거론한 것이다. 그 특징은 “대중이 자신을 평범하지 않고 탁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평범함의 권리 또는 권리로서의 평범함을 선언하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대중의 지적인 평범성이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위력은 가장 새로운 것이며 지금까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를 과거의 대중과 비교하였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적어도 지금까지 유럽의 역사상 일반 대중이 매사에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들 대중은 신앙, 전통, 경험, 격언, 그리고 습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나 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견해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은 예술과 그 밖의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대중은 자신에게 이론을 주장할 자질이 없다는 선천적인 한계 의식이 의견을 갖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그럼 현대의 대중은 어떤가?

“그런데 오늘날의 평범인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일어나려고 하는 모든 것에 관해 특별히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습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필요한 것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데 남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이제는 들을 때가 아니고 판단하고 판결하고 결정할 때이다. 더는 자신이 관여하지 않을 사회생활의 문제는 없다고 여기고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데도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렇게 현대의 대중이 대담하게 타인에게 강요하는 ‘의견’은 어떤 것인가? 오르테가는 이 평균인의 ‘견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견해라고 할 수 없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것도 교양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견해, 교양이라고 하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견해를 갖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가 요구하는 경기의 규칙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춰야 한다. 그것을 규제하는 권위와 토론의 기준이 되는 일련의 규칙이 인정되지 않는 곳에서는 의견이나 견해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런 규칙이 교양의 원칙이다.”

오르테가는 “토론을 하는 어떤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는 데 무관심하거나 진리를 추구할 생각이 없다면 그는 지적으로 야만인이다. 실제로 이것이 발언하거나 강연하고 글을 쓰는 대중의 입장이다”라고 지적했다.

견해가 진정한 견해가 되려면 그것을 가지려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권위, 즉 심판, 토론의 기준이 되는 일련의 규칙을 갖추고 그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곳에는 교양이 없다.

“우리의 이웃들이 기준으로 삼을 규칙이 없는 곳에는 교양이 없다. 기준으로 삼을 시민법의 원리가 없는 곳에는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토론하면서 상대방의 최종 입장을 존중해주지 않는 곳에는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관계를 보호해줄 거래 규칙이 없는 곳에는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학 논쟁에서 예술작품을 정당화할 필요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곳에는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는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것은 가장 엄밀한 의미의 야만성(barbarie)이다. 이것이 대중의 반역이 진행되는 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오르테가는 우려한다. 오르테가가 말하는 야만이란 규칙이나 호소할 수단이 없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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