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8. 대중은 왜 모든 일에 개입하고 그것도 폭력적으로 개입하는가(하)
 

규칙이나 호소할 수단이 없는 야만의 구체적인 사례로 오르테가는 생디칼리즘과 파시즘을 지적한다. 이것들을 오르테가는 기이하다고 설명한다. 왜? 그 모습이 기상천외했기 때문이다. 즉 생디칼리즘과 파시즘이 대두하면서 유럽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위 이유를 상대에게 제시하지 않고, 또한 자기정당화도 바라지 않는 인간, 오히려 단순명쾌하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인간의 유형이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 새로움이 있다. 근거를 갖지 않는 권리, 무근거의 도리이다. 나는 여기서 대중이라는 새로운 양식, 즉 그럴 능력이 없으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대중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을 본다. 그들의 정치적 행동에서 이 새로운 정신구조가 전혀 배려 없고,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그 핵심은 지적 폐쇄성에 있다.”

생디칼리즘(syndicalism)은 20세기 초에 서유럽에서 나타난 운동이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을 생디카(syndicat)라고 하고, 이것에서 파생한 syndicalisme은 ‘노동조합운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프랑스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이 말이 정착되었을 당시 이것을 주도한 활동가나 노동자의 운동이나 사상이 당시부터 ‘혁명적 생디칼리즘’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 이외에서는 이 특징적인 운동을 생디칼리즘(syndicalisme[영어])이라고 칭하게 된다.

생디칼리즘은 19세기말에 현저해진 노동운동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 정당의 개입과 지배(대표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당’)를 배척하고 운동의 기초 단위인 생디카의 자발적 행동을 중시하고 그것을 통합하는 연합조직의 원리로서 연방주의(federalism)를 취한다.

당시의 사회주의 정당은 의회에서의 입법수단에 의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중시하게 된 것을 비난하고 생디카에 의한 직접행동(사보타주(sabotage)나 스트라이크(strike) 등)을 주장한다.

최종적으로는 이 직접행동의 저편에 실현된 제너럴 스트라이크에 의한 사회혁명을 목표로 한다. 생디카는 이때 직접 행동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미래 사회 생산의 기초가 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어 오르테가는 평균인, 즉 대중의 지적 폐쇄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균인은 자신의 머릿속에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견해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다. 견해가 만들어지는 기반인 매우 세밀한 요소가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그는 견해를 제시하고 싶어하면서도 모든 견해의 기반이 되는 조건과 전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즉 의견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그에 필요한 조건이나 전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견해’가 고유의 견해가 아니고 언어의 유희, 연애시곡과 같은 것이다.

그럼 견해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견해가 견해로서 인정받으려면 필요한 조건과 전제는 무엇일까?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며, 즉 하나의 이성, 이해가능한 진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견해를 갖고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 즉 사색하고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그러한 권위에 호소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고, 그 규칙과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따라서 최고 형태의 교류는 우리의 견해에 관한 근거를 논의하는 대화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이 이런 대화, 토론을 하게 되면 자기 상실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최고의 권위, 최고의 심판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왜 토론에서 대중은 자기 상실감을 느낄까? 그가 제시하는 견해는 정당한 근거가 없는 견해여서 그 근거를 논하면 죄다 부정당하거나 폐기되기 때문이다. 대중이 제시하는 의견마다 ‘그건 아니다’고 판정을 내리면, 마치 자신이 거부당하거나 폐기되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대중이 이렇게 최고 권위를 거부하니 유럽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토론 중지’이다.

“유럽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토론 중지’이다. 대화나 학문에서 의회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인 규칙을 존중하는 모든 형태의 상호 교류를 싫어한다. 이는 규칙에 따른 공존인 교양의 공존을 거부하고 야만적인 공존으로 후퇴한 것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절차들을 모두 폐지하고 바라는 것을 직접 강요한다.”

오르테가는 대중이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 개입하도록 만든 마음의 폐쇄성이 이제는 직접행동이라는 유일한 개입 방식으로 대중을 이끌어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1900년대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와 리얼리스트 집단이 ‘직접행동’이라는 용어와 방법을 발명했다고 지적했다.

힘은 사실 최후의 수단이고 이성이었다. 더는 호소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수단이었다. 문명이란 힘을 최후의 수단으로 유지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즉 ‘직접행동’이 그 순서를 뒤집어 폭력을 최초의 이성(prima ratio), 엄격히 말하면 유일한 이성(unica ratio)임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 최초 행사하는 수단이고 그것도 유일한 수단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모든 규범의 철폐를 제안하고, 우리의 목표와 그 실시 사이의 모든 과정을 철폐하는 규범이다. “폭력은 야만의 대헌장이다.”

다시 대중의 행동으로 돌아와 오르테가는 과거 어느 시대에서나 대중이 사회생활에 개입했을 때 언제나 ‘직접행동’의 형태로 개입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즉 ‘직접행동’은 대중에게 항상 자연스러운 행동 방식인 것이다. 오늘날 대중의 사회생활에 직접적인 개입이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것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바뀌고, ‘직접행동’이 공식 승인된 규범으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르테가는 “오늘 인간 공생이 모두 간접적인 절차가 폐지된 새로운 체제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인간관계에서 ‘예의범절’이 폐지되고 ‘직접행동’으로서 문학이 비난 중상의 언어로 구성된다. 성적 관계에서도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

오르테가는 대중이 이렇게 직접행동을 함으로써 문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고 사회는 야만의 시대가 된다고 우려한다.

“절차, 규범, 예의, 조정, 정의, 이성! 이 모든 것이 왜 발명되었는가? 왜 이 복잡한 것이 창조되었는가? 이 모든 것은 ‘문명’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문명의 기원은 시민을 뜻하는 키비스(civis)라는 개념에서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이 시민, 공동체, 공생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열거한 문명의 도구 하나하나를 내부에서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모든 것은 각각 타인을 고려하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문명은 먼저 무엇보다 공생하려는 의지이다. 인간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반시민적이고 야만이 된다. 야만은 해체를 지향한다. 그래서 모든 야만 시대는 인간적인 확산의 시대, 서로 분리되어 적대시하는 극소 집단이 만연한 시대였다.”

오르테가는 이제 정치 분야에서 ‘직접행동’에 의해 야만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본래의 자유민주주의를 설명한다.

“정치분야에서 가장 고매한 공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형식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타인을 고려하고자 하는 결의를 극대화한 것이며, ‘간접 행동’의 원형이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권리의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회적 권력은 자신의 전능한 권력을 제한하거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에 자유로운 공간을 남겨두려고 한다. 그것은 권력측에 있는 강한 사람 즉 다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는 장소를 남기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가 최상의 관대한 제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수가 소수에게 권리를 부여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지구상에 울려 퍼진 가장 고귀한 외침이다. 그것은 강한 적뿐만 아니라 심지어 약한 적과도 공생하겠다는 결의를 선언한다.”

그런데 대중의 직접행동이 만연함에 따라 적과의 공존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하나의 동질적인 대중이 공적 권위를 제압한 다음 사회적 권력 위에서, 반대집단을 모두 진압하고 멸종시키고 있다. 대중은 그 밀도와 엄청난 수를 보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데,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과의 공생을 원하지 않는다. 대중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죽을 만큼 싫어한다.

적과의 공존! 반대세력과의 협력 통치! 이런 우아함을 이미 이해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것은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