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 높아보기]곁에 살아있는 영혼도 없이 홀로 서있는 유럽인
[명저 높아보기]곁에 살아있는 영혼도 없이 홀로 서있는 유럽인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2-03-07 0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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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6)

1부 대중의 반역

3. 시대의 높이(하)

 

근대라는 문제가 많은 명칭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성장하여 19세기 들어 마침내 실현됐다고 보는 오랜 소망은 요컨대 ‘근대 문화’라고 스스로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많은 명칭이다. 한 시대가 자기 시대를 ‘근대’ 즉 최후의 결정적 시대라고 부르고 나머지 모든 시대는 단순한 과거이자 자기 자신을 향해 조심스런 준비와 열망의 시기라니! 이 무슨 과녁에도 못 미치는 힘없는 화살인가!”

오르테가는 19세기가 스스로 ‘근대’라고 한 것은 문제가 많다고 본다. 여기서 근대는 어떤 의미인가? 오르테가가 주를 달아 설명한 것을 보자.

“한 세대 전의 시대가 자신들을 ‘근대’ ‘근대성’이라고 명명한 본래의 의미는 내가 여기서 분석하는 ‘시대의 높이’라는 감각을 매우 예리하게 드러내 준다. 근대란 말은 양식(modo)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오래된 전통적이고 낡은 양식에 맞서 등장한 새로운 양식과 수정 또는 유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근대’라는 말은 옛 생활보다 더 나은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동시에 시대의 높이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뜻하기도 한다. ‘근대인’에게 근대적이지 않다는 말은 역사 수준에 못 미친다는 말과 같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근대’란 과거의 오래된 전통적이고 낡은 양식에 맞서 등장한 새로운 양식과 수정(修訂), 또는 유행을 의미한다. 이는 과거를 준비 기간으로 보는 견해와는 맞지 않는다. 절정기인 19세기는 과거를 준비 시대, 곧 절정이 이르지 못한 열등한 시대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며 완전히 성숙한 시대는 과거 시대들을 딛고 올라선 것으로 여겼다. 즉 과거 여러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절정기를 맞이한 19세기는 새로운 양식, 유행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본질적인 차이

19세기가 자기 시대를 ‘근대’ 즉 최후의 결정적인 시대라고 보는 점에 19세기와 우리의 시대, 여기서는 20세기 초로 두 시대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오르테가는 지적한다. 우리의 시대는 어떻게 자신의 시대를 보는가?

“우리 시대는 이미 우리를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어렴픗 하지만, 우리 시대 안에 깊은 곳에서 직관적으로 안다. 즉 결정적이고 확실하고, 영원한 결정화(結晶化)한 시대는 없다는 것을.”

이렇게 보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른바 ‘근대 문화’처럼 어떤 유형이 결정적이다는 주장을 보게 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시야가 좁고, 시야가 흐린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현대인은 “결정적이고 확실하고, 영원한 결정화한 시대가 없다는 것”을 느낄 때 감동에 젖는다. 그것은 봉쇄된 좁은 경내를 벗어나고, 별이 빛나는 밤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 세계로 들어서는 흡족한 감동이다. 그 세계는 심오하고, 무시무시하고, 예측할 수 없고, 끝이 없다. 그곳에는 좋든 나쁘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우울한 근대문화, 시끌벅적한 20세기 문화

오르테가는 근대문화에 대한 믿음이 우울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내일도 오늘과 똑같고, 진보라고 해도 우리가 이미 걸어온 길과 동일한 길을 영원히 전진하는 것뿐이라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30년 전에 이미 유럽인들은 19세기인들은 인간의 삶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높이와 여러 세대에 걸쳐 열망해온 수준, 앞으로 영원히 지속돼야 할 위치에 도달했다고 여겼다. 그 시대는 결정적이고 확실하고, 영원한 결정화(結晶化)한 시대였다. 매일 같이 같은 길이 반복된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고 영원한 감옥이 될 것이다.

이렇게 느낀 시대가 또 있었다. 로마제국시대이다.

“로마제국 초기 루카누스와 세네카와 같은 변방 출신 순수한 사람들이 로마에 와서 절대적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제국의 장엄한 건축물을 보았다면 답답한 심장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세상에는 더는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마는 영원하다.”

더는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데, 로마제국은 영원하다고 하니 감수성이 예민한 변방인들은 답답하고 우울해졌을 것이다.

우울한 근대문화와는 대조적으로 20세기 문화는 시끌벅적하다. 

“우리 시대의 감정은 학교를 막 빠져나온 아이들의 시끌벅적함과 더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내일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것이 우리를 은근히 즐겁게 한다. 왜냐하면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지평선이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삶, 즉 생의 진정한 충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단은 현대의 많은 작가가 쓴 글에 나타나는 몰락의 탄식과는 대조적이다.”

19세기에는 “진정한 생의 충만을 만족, 달성, 도달”로 보았다면 20세기에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지평선이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으로 본다. 20세기의 이런 감수성은 몰락으로 보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여기서 오르테가는 당시 회자되는 ‘몰락론’을 검토하여 오류를 지적한다.

먼저, 몰락 주장은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 시각적 착오인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나머지 역사의 정치적 측면이나 문화적 측면을 보면서 그것들이 역사의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몰락을 진단할 때 “몰락이란 상대적 개념이다. 그것은 높은 상태에서 낮은 상태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교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관점에서 할 수 있다”면서 이런 관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전체를 평가해야 하는 삶 자체에 대해 부분적이고 임의적이며 피상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라고 권고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몰락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오르테가는 “그 가치를 평가하는 삶, 그 삶 속에 몸을 두고 그것을 내부에서부터 조망해서 삶이 스스로 몰락했다고, 다시 말하면 감소하고 약해지고 무미건조해졌다고 느끼고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떠한 과거의 어떠한 시대의 삶도 좋아하지 않는, 즉 자신의 삶이 항상 더 좋다고 하면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을 몰락했다고 할 수 없다”면서 오르테가는 시대의 높이에 관해 탐색해온 모든 것이 이 점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과거를 보는 19세기와 20세기의 두 시각

“19세기 살롱에서는 귀부인들과 그녀들의 취향에 길들어진 시인들이 서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때가 꼭 있었다. ‘어느 시대에 살고 있다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떠올리며, 역사의 흐름을 이리저리 상상하면서 자신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릴 시대를 찾느라 애를 썼다.”

19세기 사람들이 이렇게 한 까닭을 오르테가는 19세기가 자신들이 절정에 있다고 느꼈고,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그 어깨 위에 올라 있다고 믿었던 과거에 역으로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19세기는 자신을 과거의 정상(頂上)으로 보았고 그 때문에 고전 시대-페리클레스 시대와 르네상스와 같은 시대에 19세기의 모든 가치가 준비되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들은 얼굴을 뒤로 돌려 자신의 시대에서 완성되는 과거를 바라본다.”

그러면 20세기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볼까. 오르테가에 따르면 20세기 사람들은 어떠한 과거든 예외 없이 숨쉬기도 곤란한 답답한 공간이라 느낀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은 자신의 삶이 과거의 어떤 삶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거꾸로 과거 전체가 시시하다고 여긴다. 애초부터 우리의 삶은 과거의 어떤 삶보다도 훨씬 풍부하다고 느낀다. 이러면 몰락이란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어떤 삶보다도 우리 시대를 ‘더 나은’ 삶이라고 여기면서 과거에 대한 모든 존경과 관심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모든 고전주의를 백지로 돌리고, 어떠한 과거에서도 모범이나 규범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와 지금 여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직면해 있다. 그러면서 몇 세기에 걸쳐 면면이 발전하여 그 결과 돌연 나타난 시대, 그러나 시작, 여명, 개시, 유년기라는 인상을 주는 시대와 조우하고 있다. 뒤돌아보면 저 유명한 르네상스도 우리에게는 답답하고 촌스러우며 헛된 몸짓을 지닌-배려 없이 말한다면-평범한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20세기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과거와 단절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오르테가는 “죽은 자들이 외견상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죽어, 이제 유럽인들은 오로지 홀로 서 있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심각한 괴리는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근래의 삶에 독특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소 곤혹스러운 의혹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별안간 지상의 외톨이가 되었으며, 죽은 자들은 외견상 죽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었기에 더는 우리를 도울 수 없다고 느낀다. 남아 있던 전통적 정신은 모두 증발해버렸다. 과거의 모범, 규범, 기준은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술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과거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현실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 유럽인은 그의 곁에 살아 있는 영혼들도 없이 홀로 서 있다.”

유럽인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오르테가는 마치 페터 슐레밀(Peter Schlehmil, 독일의 시인이자 식물학자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1781~1838))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 또는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의 주인공이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것으로 비유한다.

앞에서 오르테가는 ‘시대의 높이’가 “현대의 가장 놀라운 특징의 하나를 특정하는 방법을 제시해준다”고 중요하게 여겼다. 이 시대의 높이를 깊이 고려한 결과 얻게 된 현대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과거에 대한 모든 존경과 관심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고전주의를 백지로 돌리고, 어떠한 과거에서도 모범이나 규범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높이

이제 현대인은 자신의 시대 높이를 어떻게 느끼는지 보자.

“우리 시대의 높이, 그것은 절정, 시대의 정상, 충실의 시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과거의 모든 시대보다 위에 있고 알려진 모든 충실보다도 위에 있다고 느낀다. 우리 시대가 스스로 느끼고 있는 인상을 공식화(公式化)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현대는 다른 시대보다 풍요하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느낀다. 그러면서 그것이 말기의 고뇌가 아니라는  자신도 없다.”

오르테가는 마지막으로 현대인이 자신의 시대를 보는 시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다른 모든  시대보다 위에 있지만 자기 자신보다는 열등하며 매우 강하면서 동시에 자기 운명에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시대.  자신의 힘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그 힘을 두려워하는 시대. 이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현대인의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대중의 반역》을 읽어나가면 내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오르테가의 ‘근대와 현대’ 개념을 좀더 살펴보자.

근대와 현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오르테가는 19세기 근대와 20세기 초를 명확하게 구별한다. 오르테가는 1921년부터 22년까지 마드리드 대학에서 한 강의를 토대로 약간 가필하여 이듬해인 23년에  《현대의 과제》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의 철학 이념은 이미 사멸하고 “우리 시대(nuestro tiempo)=현대”의 새로운 이념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근대와 현대’에 관해서는 김현창 옮김 《대중의 반란/철학이란 무엇인가》(동서문화창업60주년 특별출판, 동서문화사, 2016. 402~403쪽)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하면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오르테가는 갈릴레오,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약 300년 계속된 포스트르네상스, 즉 ‘근대 합리주의’의 시대와 그 자신의 20세기 초두의 시대와의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그으려고 생각했다. 이 의미에서 그는 ‘근대(edad modern)’와 ‘현대’를 용어상 엄밀하게 구별한다.

이러한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은 과학의 급속한 진보에 의해 그 지적 역사가 변모한다. 그러나 특히 에스파냐에 관해서는 옛날 유럽을 제압했던 황금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쇠퇴하기만 하여 ‘암흑의, 후진적인, 신비적 에스파냐”라고 불렸을 정도로 유럽 중심에서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멀어지고 말았다. 종교개혁에서 산업혁명에 이르는 시대의 파도에 타지 못하고 유럽 가장자리에 남겨진 에스파냐를 어떻게든 유럽 대가족의 일원으로 되돌리고 싶다.[....] 오르테가가 청년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에스파냐의 유럽화 구상이 이 책의 큰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다. 오르테가는 데카르트의 흐름을 이어받는 근대사상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새로운 유럽 철학의 시대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에스파냐를 낳는 모체라고 생각했다.

근대유럽문화의 모체였던 데카르트 철학은 오르테가에 의하면 두 개의 대립적인 이념 즉 이성주의(racionalismo)와 상대주의(relativismo)라는 양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자는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등에 의한 합리주의적 전통을 살렸으나 문화를 쇠퇴시켰다. 후자는 단순한 주관적 경험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며, 있는 것은 오직 각 주관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진리뿐이라는 이념이며 인간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회의주의이고 일종의 자살론이다. ‘이성주의는 진리를 고수하여 생을 돌보지 않는다. 상대주의는 불변적인 진리보다도 실존성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 어느 쪽에도 자신의 정신을 둘 수가 없다고’고 하며 오르테가는 이 ‘생’과 ‘이성’의 대립을 해소하는 이념 ‘생의 이성’ 철학을 만들어냈다.

 

        

[3. 시대의 높이(상) 시대의 높이를 절정기라 본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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