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 톺아보기] 현대 대중의 특징은 자기폐쇄성과 고집불통
[명저 톺아보기] 현대 대중의 특징은 자기폐쇄성과 고집불통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2-04-04 0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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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11)

1부 대중의 반역

7 고귀한 삶과 범속한 삶, 혹은 노력과 무기력

오르테가는 7 고귀한 삶과 평범한 삶, 혹은 노력과 무기력에서 20세기 대중의 삶을 분석한다. 먼저 20세기 대중의 삶을 19세기 등 그 이전 시대 대중의 삶과 대조하고, 이어 대중과 귀족의 삶을 비교한다.

비교에 앞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 관계는 세계가 인간 정신의 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의 기본적인 모습이 마치 주형에 의해 형체를 찍어내듯 환경의 윤곽에 따라 정신 속에 찍혀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산다는 것은 바로 세계와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일반적인 모습이 우리 삶의 일반적인 모습이 된다. 이는 이미 언급한바 있는 오르테가의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환경이다”를 좀 더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정신의 기본적인 모습을 결정하므로 세계가 달라지면 그 모습도 달라진다. 그런데 현대의 대중을 낳은 세계는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세계이다. 오르테가는 이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 새로운 세계가 대중의 삶을 어떻게 달라지게 했는가?

“과거의 평균인에게 산다는 것은 자신의 주위에 곤경, 위험, 빈궁, 운명의 제약, 예속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안전이 보장되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세계가 주는 인상이 대중 각자의 마음속에 내면의 소리가 되었다고 오르테가는 설명한다. 이러한 기본적이고 영속적인 인상이 현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신을 형성하여 기본적인 인상이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속삭이고, 동시에 일종의 명령처럼 삶의 정의를 암시하는 내면의 소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내면화 과정은 과거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전통적인 인상, 즉 과거의 평균인 즉 대중인의 내면에서 속삭이는 말을 보자.

“산다는 것은 자신이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를 제약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내면의 속삭임을 듣는 과거의 대중은 항상 물질적인 제약과 자신 위에 있는 사회적 권력을 느껴왔다.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삶이었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 개선되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상승할 경우 그것은 특별한 행운으로 여겼고, 그렇지 않을 경우 엄청난 노력의 대가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모두 삶과 세계에서 매우 특별한 원인에서 비롯된 예외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속성이 아니었다.

이제 현대인, 새로운 대중을 보자. 현대인의 내면에서는 이렇게 외친다.

“산다는 것은 어떠한 제약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실제로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위험한 것도 없으며, 원칙적으로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은 없다.”

삶에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원칙적으로 나보다 더 우월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현대인은 특별한 원인에 의해 획득한 것이 아니어서 삶의 완전한 자유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확립된 상태, 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 대중인의 외부에는 제약을 인식하도록 하거나, 매순간 타자, 특히 상위의 권위에 신경쓰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현대인을 오르테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지금 우리가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인간은 본래부터 자신 이외의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한다. 무리할 필요도 없으며, 천진난만하게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즉 견해와 욕구, 기호나 취미 등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현대의 대중은 왜 이런 경향을 띠는가? 오르테가에 따르면 대중은 이류의 인간이며 극히 한정된 능력밖에 지니고 있지 않고, 자기 긍정의 근거가 되는 생활의 풍요와 만족을 주는 구조 자체를 유지할 능력조차 없다는 것을 어떠한 것도 어떤 사람도 무리해서라도 그에게 일깨워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금까지 현대의 대중과 그 이전의 대중을 비교하였다. 이제 현대의 대중과 ‘선택된 인간’ 혹은 ‘우수한 인간’과 비교한다.

환경이 강제하지 않는 한 현대의 대중은 자신 이외의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환경이 강제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대중은 그 성격 그대로 누구에게도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대의 대중은 다른 누구에게도 의견을 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과는 달리 ‘선택된 인간’ 혹은 ‘우수한 인간’은 그 반대로 한다. 선택된 인간은 자신보다 훨씬 위에 있는 규범을 따르고 그것에 기꺼이 복종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된 인간’은 앞 ‘1 밀집의 사실’에서 말한 ‘선택된 소수’를 말한다. 우수한 인간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인간이고, 평범한 인간 즉 대중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 상태에 만족하여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이다.

오르테가는 우수한 인간의 삶을 고귀한 삶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본질적인 종속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대중이 아니라 우수한 인간이다. 우수한 인간은 뭔가 초월적인 것에 헌신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봉사의 필요성을 억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종 그에게 억압이 없다면 불안해져서 자신을 강제할 더욱 어렵고 요구가 많은 새 규범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규율에 따라 사는 삶, 곧 고귀한 삶이다. 고귀함은 권리가 아니라 요구와 의무에 의해 규정된다. 곧 고귀한 의무(Noblesse oblige)이다.”

오르테가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여 “제멋대로 사는 것은 평민의 삶이고 귀족은 질서와 법을 동경한다”고 요약하였다.

오르테가가 말하는 귀족은 혈통에 의한 귀족, 세습귀족이 아니다. 그는 귀족이라 번역한 ‘nobleza’의 어원까지 살펴가며 그가 의미하는 귀족을 설명한다. 어원을 보면 “귀족이란 ‘잘 알려진 사람’, 즉 누구나 알고 있는, 무명의 대중 위로 우뚝 솟아 알려지게 된 유명인을 의미한다. 유명하게 만든 것은 비범한 노력이다. 그러니까 ‘귀족적’이라는 것은 비범하게 노력하다거나 탁월하다는 의미이다.

세습으로 귀족이 되면 비범한 노력이 없이 받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반감된다. 게다가 ‘고귀한 의무(Noblesse oblige)’의 본래 의미도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최초로 귀족이 된 이는 스스로 자신에게 의무를 부여하지만 세습의 귀족은 상속으로 그 의무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르테가는 아버지가 자녀를 귀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귀족의 작위를 취득하면서 조상들을 귀족으로 만드는 중국의 사례가 더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 중농학자 프랑수와 케네(1694 ~ 1774)가 1767년 출판한 《중국의 전제주의》에도 나온다.

“유럽에서는 귀족 신분이 아버지로부터 자식으로, 그 후손으로 이동한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자식으로부터 아버지로, 아버지의 선조로 이동한다. 치자는 그가 하사하는 귀족 신분을 상황에 따라 4대, 5대, 심지어 10대의 선조에까지 소급해 확대한다.”(황태연·김종록 지음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김영사, 2015, 194~195쪽)

오르테가에 따르면 귀족(nobleza)라는 말이 공식 용어로 로마제국 시대에 등장하였을 때 몰락한 세습 귀족에 대한 반대의 의미였다. 세습 귀족이 아닌 진정한 귀족, 오르테가는 귀족을 이렇게 본다.

“나에게 귀족이란 활력이 넘치는 삶과 동의어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이미 획득한 것을 넘어 자신에게 의무와 요구를 부과하는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삶을 말한다. 이처럼 고귀한 삶은 범속한 삶, 무기력한 삶과 대치가 된다. 무기력한 삶은 외부의 힘이 자신 밖으로 나오도록 강제하지 않으면 정적인 상태로 자기 자신을 격리한 채로 끝없이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을 대중이라고 부른다. 군집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기력하기 때문에 대중이다.”

이런 귀족을 오르테가는 소수자, 선택된 사람, 고귀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은 고행자의 삶을 산다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까지도 거슬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 외부의 필요성에 의해 강제하지 않을 경우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의 강제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훌륭한 노력을 하는 극히 소수만이 홀로 서 있는 기념비처럼 보인다.

이 기념비 같은 존재는 “선택된 사람, 고귀한 사람, 단순한 반응이 아닌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영원한 긴장의 연속이며 끊임없는 훈련이다. 훈련이란 고행(áskesis)이며 따라서, 선택된 사람, 고귀한 사람은 고행자이다.”

오르테가는 현대의 대중을 이해하기 위해 일반 대중과 진정한 귀족, 또는 노력하는 사람을 대조한 후 대중의 기본 구조를 이렇게 요약한다.

“19세기에 조직된 세계는 새로운 인간을 자동 생산해내면서 그들에게 가공할 만한 욕구와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을 불어넣었다. 그것도 모든 영역에 걸친 수단이다. 즉 경제적 수단, 신체적 수단(과거의 모든 시대보다도 우수한 위생과 건강상태), 시민적 수단, 전문적 수단(과거에는 항상 결여된, 오늘날의 평균인이 갖고 있는 방대한 양의 지식과 실용적인 효율성)이다. 19세기는 새로운 인간 속에 이 모든 잠재능력을 불어넣은 뒤 방치해버렸다.”

이렇게 방치된 대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평균인은 본성에 따라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우리의 눈에는 어느 시대의 대중보다도 힘이 있는데, 그러나 전통적인 대중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 속에 틀어박혀 아무것에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한마디로 고집불통이다.”

이러한 대중이 지배하는 유럽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중은 절박한 문제에 관해서는 탁월한 소수자의 지배를 받아들일까? 오르테가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대중 마음의 기본 구조가 자기폐쇄성과 고집불통으로 되어 있고, 사물이든 사람이든 자신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기능이 태어나면서부터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르려고 해도 그럴 수 없고, 들으려고 해도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발견하게 된다.”

대중은 생활수준이 다른 시대보다 높아졌지만 문명화 과정을 제어할 수 없다고 오르테가는 말한다. 현대의 문명을 유지하는 단순한 과정만 해도 고도로 복잡하고, 무한한 정밀성을 요구한다. 많은 문명 이기의 사용법을 배웠을지라도 그 문명 원리의 근원을 무시하는 특성을 지닌 평균인이 문명의 과정을 제어하는 것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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