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14.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1)

유럽 문명이 자동적으로 가져온 대중의 반역은 긍정적인 면은 인간 삶의 엄청난 성장이다. 부정적인 측면은 인류의 근원적인 도덕적 퇴폐이다. 오르테가는 이렇게 되풀이한 다음 대중의 반역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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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테가는 먼저 권력의 교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즉 새로운 역사적 시대구분의 실체나 특징은 인간과 인간정신의 내부적 변화 또는 형식상의 기계적인 외부적 변화의 결과이다. 외부적 변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의 교체일 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교체에는 정신의 교체가 수반된다.

따라서 한 시대를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 중 하나가 “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가?”이다.

오르테가는 지난 3세기는 유럽이 세계, 나아가 전인류를 지배했다고 보았다. 인류는 16세기부터 거대한 통일 과정에 진입하여 오늘날 그 정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16세기부터는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전인류에 대해 사실상 권위 있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인들로 구성된 동질적인 집단이 지난 3세기에 걸쳐 한 역할이 바로 이것이었다. 즉 유럽이 지배했고 세계는 그 통일된 지배 아래 단일한 양식으로 살거나 적어도 점차 통일되어 가는 양식으로 살았다.

이 생활양식을 흔히 ‘근대’라고 하는 불투명하고 불명확한 명칭으로 부르는데 이 명칭 속에는 ‘유럽의 헤게모니 시대’라는 현실이 감추어져 있다고 오르테가는 지적한다.

그런데 오르테가가 말하는 ‘지배’란 어떤 의미일까? 오르테가는 ‘지배’는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힘이나 물리적인 강제력 행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배’라고 할 때 사람들 간의 안정된 정상적인 관계는 결코 힘에 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어느 한 사람 또는 일군의 사람들이 지배한다면 그들은 ‘힘’이라고 불리는 사회 기구 또는 사회 기계를 마음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침략하여 그 상태를 한동안 유지하였지만, 그는 진정 단 하루도 스페인을 지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오직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는 권위의 통상적인 행사이다. 이는 언제나 여론에 기초한다. 지금까지 여론이외의 다른 것에 의존하여 지배권을 행사한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 총검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만 총검 위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지배를 하려면 앉아야 하고 군대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한다. 지배한다는 것은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조용히 행사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배한다는 것은 왕위, 고관, 의회 의원, 주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소설의 천진난만한 시각이 상정하는 것과는 달리 주먹의 문제라기보다 자리의 문제이다. 국가란 결국 여론의 상태이자 균형의 상태, 정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가끔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태도 발생한다. 사회가 의견이 다른 집단으로 나누어져 그 의견의 힘이 서로 상쇄될 때 하나의 통합이 형성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이 진공 상태를 싫어하듯 여론의 힘 부재로 생겨난 이 공백은 폭력으로 채워진다. 결국 폭력이 여론의 대용품으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지배라는 것은 하나의 여론, 곧 정신이 갖는 절대적인 권력이다. 즉 지배는 정신적인 권력이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 증명해준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형성된 최초의 국가 혹은 공적 권위는 교회라는 ‘정신권력’을 기반으로 했다.

어떤 인간이나 민족 혹은 어떤 동질적 집단이 주어진 시대를 지배했다는 말은 특정한 여론 체계-사상, 기호, 열망, 목적 등-가 당시의 세계를 지배했다는 말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견해가 없어서 마치 기계에 윤활유를 치듯 이 견해를 외부에서 주입해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신이 권력을 갖고 견해가 없는 대다수 사람이 견해를 갖도록 권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견해가 없다면 인간의 공적생활은 혼란과 역사적인 공허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정신권력이 없고 아무도 지배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그런 것이 부족하면 할수록 혼란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권력이나 지배자의 교체는 동시에 여론의 교체를 의미하고, 그 결과 역사적 중력의 교체를 의미한다.

중세에는 아무도 현세적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상 모든 중세에 나타난 현상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언제난 상대적 무질서와 상대적 야만, 여론 결핍을 상징한다. 이 시대는 사랑하고 미워하며 열망하고 반발하는 시대이고 이 모든 것이 대규모로 나타난 시대다. 반면에 견해는 거의 없었다.

위대한 시대에는 인간이 견해를 갖고 살며 그래서 질서가 존재한다. 위대한 지배자 로마가 그랬다. 로마는 지중해와 그 주변 지역에 질서를 수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이 더는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는 권력의 교체를 암시한다. 누가 유럽에 이어 세계를 지배하는가? 만일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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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성이나 개념을 끝없이 복잡한 삶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익숙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오르테가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삶이란 사물들 속에서 자신을 유지시켜나가기 위한 투쟁이다. 개념이란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작전 계획이다. 따라서 어떤 개념이라도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인간이 그 사물과 더불어 할 수 있는 것과 그것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에 관해 말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개념에 항상 생명력이 존재하고 인간에게 행동이나 피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이렇게 설명한 오르테가는 본론으로 들어와서 “지금 세계-역사적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곧 지난 3세기 동안 유럽이 세계를 지배해왔지만 이제는 지배하고 있지도 않고 계속 지배할 것같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사실이 지금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결과이자 조건이고, 징후이거나 에피소드라고 오르테가는 말한다.

오르테가는 다시 “유럽이 지배를 중단했다고 말하지 않았고, 엄밀하게 말해서 유럽이 과연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계속 지배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오르테가는 유럽의 몰락을 믿지 않지만, 세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왈도 크랭크는 《아메리카의 재발견 The Rediscovery of America》에서 “유럽은 단말마의 고통 속에 있다고 전제하고 쓴 것이다.

유럽이 몰락하고 있다고 보여 많은 민족이 교실에서 선생님이 나간 후 아이들처럼 행동을 하고 있다. 모두 선생님의 존재가 준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규칙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길길이 날 뛰여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쁨을 만끽한다.

이러한 모습을 오르테가는 중소 국가들은 유럽이 몰락하고 지배를 중단했다고 하니까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른의 흉내를 내며 우쭐해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곳에서 ‘민족주의’가 세균처럼 번식하여 일대 파노라마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르테가는 대중을 국가에도 적용할 때 대중국가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대중의 특징인 스스로 평범함을 알면서 평범함의 권리를 주장하고 상층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국가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역사를 이끌어온 소수 엘리트나 위대한 창조적 민족에 대해 대중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대중민족pueblos-masa)’이 되어 일치 단결하여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고 오르테가는 본다. 일부 소국가들이 길 없는 모퉁이에서 발끝으로 서서 유럽을 탄핵하고 세계사에 대한 유럽의 면직을 선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민족은 유럽 문명이라는 규범 체계가 효력을 상실했다고 결의하긴 했지만, 다른 체계를 만들어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르며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난장판을 벌이는 일에 몰두한다. 이것이 세계 속에 아무도 지배자가 없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첫 번 째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