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나를 얼마나 사랑해?”

“응,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대화이다. 도대체 하늘과 땅만큼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된다. 그 만큼 많이 사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늘이 우리 삶에 녹아 들어와 있다.

조선시대 아이들이 서당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첫 글자는 하늘 천(天), 두 번째 글자는 따 지(地), 그걸 읽는 아이는 사람 인(人)임을 익힌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늘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만큼 하늘과 친숙하다는 의미도 된다. 노는 시간에 아이들은 가위(사람), 바위(땅), 보(하늘)를 지치지도 않게 하면서 천, 지, 인의 관계를 쉽고도 재미있게 익혔고, 또 아가가 고개를 가눌 정도만 되면 어른들이 ‘깍꿍, 깍깍꿍’하며 어르고 달랜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그것은 “하늘, 땅, 사람이 너의 뇌와 몸에 하나로 녹아들어와 있으니 네가 바로 밝고 환한 깨달음의 궁전(覺宮)임을 알아라.”라는 뜻이었다.

한국인의 색깔은 무엇일까? 이것은 곧 한국인다움을 의미한다

우리 일상의 대화 주제 중에는 때 아닌 색깔론도 간혹 등장하곤 한다. 여기서 색깔론이란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색깔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간혹 나는 억울하게도 색깔이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굳이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 말을 듣곤 한다. 그런 내가 확실하게 색깔을 가질 때가 있다. 술자리에서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봉숭아 꽃잎에 물들인 것처럼 선홍빛이 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항상 홍익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자기 색깔이 너무 강하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된다. 색깔의 유무와 그 정도는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하고, 살면서 다양한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해야 된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취중 진담 같은 색깔론이다.

이렇듯 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나라도 색깔을 갖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색깔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여기서 색깔은 정체성을 의미한다. 한국인다움이라는 말과도 서로 통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자기 색깔에 맞는 삶을 살고자 한다. 예를 들면 무지개 색동저고리를 입고 싶은 나이 때도 있고 비단 다홍치마를 입고 싶은 나이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색깔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해 진다. 지금의 한국은 7명의 환인과 18명의 환웅 그리고 47명의 단군, 즉 72명의 깨달은 성인들이 나와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지금의 한국인들 모두는 그들의 후손이다. 서로서로 도와가며 한 집처럼 지내고 싶어 하는 한국인의 오지랖의 근본은 무엇인가 또는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이기도 한 홍익의 원천은 무엇인가?

홍익, 하늘마음에서 비롯되다

모두 하늘마음에서 비롯된다. 하늘마음이 무엇이고 그 뿌리는 무엇인가. 사실 알고 나면 너무나 명약관화 하다. 너무 쉽고 분명해서 이해가 안 될 수가 없다. 하늘이라는 실체가 없는 공간, 하지만 한국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은 법칙과 원리로 존재하는 하늘을 말한다. 하늘의 섭리대로 살고자 했던 한민족, 하늘에는 경계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늘을 내 준다. 그 하늘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수용하고 이해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하늘마음이다. 하늘처럼 높고 넓으며 밝고 환하여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마음,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홍익이다. 그래서 홍익의 궁극적인 의미가 모두가 하나라는 데에 있다.

한국인다움의 출발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고귀함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다움과 한국인다움, 즉 ○○다움과 ○○답게의 의미는 달리 말하면 ○○다움(답게) 이전에 이미 그 상태에 도달함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인간다움의 출발이 인간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점인 것처럼 한국인다움의 출발 또한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미 소중하고 고귀함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한국인다움의 출발이다.

소설 『대지』를 집필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여사는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로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명 받아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뿌리를 알고 싶어 한국을 방문한다. 그녀가 본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소달구지와 함께 걸어가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소달구지에 볏단을 다 싣고 본인도 타고 갈 수 있었음에도 그날 하루 동안 많은 일을 한 소와 함께 볏단을 나누어지고 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이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농부에게 물었다.

펄 벅 여사 : “소달구지에 타지도 않고 왜 힘들게 갑니까?”
한국 농부 : “오늘 우리 소가 일을 많이 해서 고생했으니 내가 짐을 나눠지고 갑니다.”

후에 미국으로 돌아간 펄 벅 여사는 이 모습이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했다. 서양의 농부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소달구지 위에 짐을 모두 싣고 자신도 올라타 편하게 집으로 향했을 것이지만 한국의 농부는 소의 짐을 덜어 주고자 자신의 지게에 볏단을 한 짐 지고 소와 함께 귀가하였다. 이 모습을 보며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감나무에 감 일부를 남겨 놓아 겨울철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새들의 밥으로 남겨 놓은 ‘까치밥’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미덕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이 홍익의 원천이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뿌리임을 깨닫는다. 펄 벅 여사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홍익인간의 정신이었다.

한국인의 삶은 하늘에 부합되는 삶이었고 그것이 한국인의 역사였다

윤동주의 『서시』에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는 구절이 있다. 우주 삼라만상의 현상을 다 아우르다 보면 눈에 보이는 생명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그 형태만 변할 뿐 사라지지 않는 것, 이것은 한민족의 삼대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도 나온다. 하늘에 부합되는 삶,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었고, 별을 노래하며,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변함없는 에너지와 그 에너지로 인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은 법칙이전의 법칙으로 자유롭고도 거침없는 우리 한민족의 삶이었고, 그들의 삶의 발자취가 역사 속에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자기 자신을 잘 알려면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크게 보면 우리는 지구 중에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또 그 지구는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존재함을 인식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자기 나라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어떻게 잘 알 수 있는가? 그 답 또한 역사 속에 있다.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을 역사로 풀어낼 수 있다는 말과 서로 통한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역사의 지식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던 정신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타고 내려오는 정신과 문화, 이것을 통해 대한민국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다움의 핵심은 홍익인데, 홍익은 무엇인가? 말로만 부르짖는 것은 이미 홍익이 아니다. 홍익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는 공기와 같이 살아 숨 쉬는 것, 혹은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홍익이다. 홍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홍익은 빛을 잃고 만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말을 아끼고 삼갔다.

생김새 등 외모도 중요 하지만 단군조선 이래로 우리 역사에서는 생김새에 연연하지 않았고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였다. 특히 다종족 국가로 대제국을 이룬 고구려도 있었고, 해외에 수많은 담로를 두고 해상제국을 이룬 백제도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종들이 광활한 영토 내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단군의 후예라고 하는 우리나라는 외국인들의 귀화에 관대했다.

단군조선의 역사는 가장 오래된 미래이며, 그 미래를 열어갈 우리들 모두는 21세기 단군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면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홍익의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지구인의 마음으로 우주를 품고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사람을 품는다면 진정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정체성은 어딘가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한없이 약해질 수 있는 위기 때마다 우리는 강하게 일어섰다. 그것은 가진 것이 없어도 자기 삶을 사랑하고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했던 위대한 조상들이 남겨준 정신문화유산 덕분이다. 민족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의식을 품어야 하는 글로벌시대, 한 민족의 긍정성을 끄집어내는 것이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시민상, 즉 지구시민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이루어진 후에 더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어딘가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누구로 살아갈 것인가? 정체성은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유동적으로 계속 진화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역사에 묻혀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우리의 자화상에 드리워져 있었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어 우리의 정체성에 밝고 유쾌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하늘마음을 가진 한국인의 색깔은 하늘색이며, 그 하늘을 입고자 백의민족이 되었다

사단법인 국학원에서는 한국인이 한국인답게 캠페인으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한국인다움’은 무엇인가요?를 8월 15일 광복절부터 10월 3일 개천절까지 진행하고 있다.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광복(光復)이며, 그 뿌리가 개천(開天)에 있음을 의미한다. 개천, 즉 하늘을 연다는 것은 공간의 개념인 허공에 실제로 문이 있어 열고 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자기 안에 내려와 있는 하늘을 깨닫고 그 하늘 문을 활짝 열어 하늘의 섭리대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을 닮고자 하였으며 스스로 하늘이고자 하였던 한국인의 색깔은 하늘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래 하늘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색깔이 없다. 그 색깔을 굳이 표현하자고 한다면 무색인데 무색을 기존 색깔로 표현하려고 하니 흰색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불렀다.

한국인다움, 하늘이라는 도화지에 홍익이라는 물감으로 색칠하는 한 폭의 수채화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봉숭아 꽃잎으로 물들인 우리 누이의 손톱처럼 홍익으로 물들인 한국인의 삶, 정체성을 상실하면 처량해 보이지만 우리다움을 찾게 되면 아름답게 꽃필 것이다. 그것은 흡사 하늘이라는 도화지에 홍익이라는 물감으로 색칠하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우리에게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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