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끝자락에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해서 집 근처 관악산에 올랐다. 관악산 정상 연주봉 부근에는 연주암이라는 사찰과 연주대라는 기암절벽에 세운 불당, 응진전이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참된 마음으로 발원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연주대(戀主臺)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높고 평평한 곳을 뜻하는 말인데, 원래는 의상대, 연주봉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뀔 때 ‘두문불출’의 유래가 되는 두문동 72현 중 일부가 이곳에서 개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고려왕조를 그리워 하였다고 하여 연주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초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녕대군이었던 세종에게 왕세자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그 후 효령대군이 이곳에 올라 임금인 세종을 그리워 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연주대 위 '응진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자연스럽게 앉아 명상을 하게 되었다. 명상을 하는데, 마치 화두처럼 불현 듯 떠올랐다. “왜 부처는 세상에 나오셨을까?”

한국불교의 도래와 전통신앙과의 통섭 과정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것을 깨달은 부처, 그래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셨고 그것이 지금의 법회의 모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호국불교로 성장하였다. 때로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 힘이 되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전통 민간신앙과 통섭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흔적이 대웅전이다. '대웅전(大雄殿)’은 한자 뜻 풀이로만 보면 ‘크게 훌륭하신 (남자)어른을 모신 절’ 이다. ‘大’의 우리말은 ‘한’이다. 바로 한웅전이 된다. 역사로 볼 때 국조로 인식되고 있는 단군과 그 이전 시대에 해당하는 한인과 한웅이 있다. 역사와 신화를 통틀어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큰 어른은 한인, 한웅, 단군이다. 그 어른들을 모시는 신앙을 삼신신앙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사찰의 건물배치를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가람배치 시 가장 높은 곳에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을 배치하는 것을 볼 때 외래종교인 불교와 전통신앙이 만나 지금의 한국 불교를 낳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다양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갈등과 충돌도 일부 있었지만 결국 종교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성과 연관이 깊다. 하늘에는 경계나 울타리가 없다. 하늘을 숭배했고, 스스로 하늘이고자 했던 우리 민족은 밝은 민족이었으며, 하늘의 원리 또는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홍익’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모든 종교, 즉 으뜸되는 가르침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에서 유래된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

그런가 하면 불가에서 유래된 말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들이 많다. 대표적인 말이 '야단법석'이다. ‘야단(野壇)’은 ‘야외에 세운 단’을 말하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를 말한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00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하여 쓰이던 말이 점차 일반화하여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또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심전심의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염화시중의 미소’ 이다. 영산에서 부처님이 연꽃을 들고 설법할 때 ‘마하가섭’만이 그 참뜻을 알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고 한다. 굳이 말이나 글에 의존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염화시중의 미소’ 이다.

일상에서 바라본 불교에 대한 또다른 시선

부처가 깨달은 것과 다르게 기복신앙으로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어머니의 마음, 즉 모정의 발로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불교와 만나 부처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어쩌면 지극히 나약한 존재이기에 거대한 힘에 의지하고 싶고 도움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부처가 거대한 위력으로 작용하였고, 그 자체가 행복이고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되곤 하였다. 산 정상에 있는 불당에 다다르자 한 젊은 부부의 대화가 내 귓가에 들려 왔다.

여 : 여기 왜 와?
남 : 그냥.
여 : 난 여기 들어가는 거 싫어. 하느님 믿으면 되지.

그렇게 믿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하느님일까? 단군이든 예수든 부처든 공자든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이고 그 분들의 인격이 존재해서 믿는 것은 아닐 터. 그 분들이 남겨 놓으신 가르침과 정신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를 일깨우고 우리 안에도 단군, 예수, 부처,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전통적인 선도에서는 본성이 곧 신성이며, ‘성통공완’, ‘신인합일’ 등으로 표현한다. 신라시대 최치원은 우리에게 고유한 도가 있는데 그것을 일러 ‘풍류도’ 라고 하였다. 도덕이 사라진 자리에 국학의 정신인 ‘홍익’이 필요한 때이다. 이어서 두 남자의 대화가 들려 왔다.

남 1 : 거기 왜 내려가?
남 2 : 떡이라도 줄 거야. 작년에도 떡 얻어 먹었어.

올해는 부처님 오신날 봉축행사를 윤4월 초파일(5월 30일)에 한다고 한다. 두 남자는 떡 구경도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절에 가면 간절한 마음으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사람도 있고, 떡을 찾는 사람도 있으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있고, 명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절이라는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의식은 달라진다.

미륵신앙 그리고 한국불교가 꿈꾸는 불국정토

그리고 한국불교에서 중요하게 관심가져야 할 대상이 미륵신앙이다. 미륵신앙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닮은 점이 많다. 미래불이라고 일컫는 미륵부처의 형상은 항상 홀로 서 있는 모습이다. 미륵불이 그렇게 홀로 서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홀로 거룩하게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깨달음을 전해 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거룩한 존재임을 알고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 또한 거룩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끼고 존중해야 되는 것이다. 누구나 꽃이다. 그래서 피는 꽃마다 아름답다. 꽃 중의 꽃은 웃음꽃이라고 한다. 단군을 비롯 예수, 부처, 공자를 포함하여 많은 성인들이 우리 인류사에 미친 선한 영향을 생각하며 웃음꽃 가득한 삶을 선택하면 광명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불교가 꿈꾸는 불국정토일 것이다.

단군의 홍익정신을 계승하여 오늘을 사는 부처가 되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도래하여 전통 신앙과 고유한 민족문화인 선도와의 통섭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한국불교로 자리잡게 되었고, 통도사, 법주사와 같은 한국 사찰들은 인류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 부처의 깨달음 또한 단군의 홍익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부처의 깨달음과 단군의 홍익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미래의 부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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