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읍지가 말해 주는 또 다른 역사
도읍지가 말해 주는 또 다른 역사
  • 민성욱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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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0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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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가 망국의 한을 노래한 시조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시조라서 지금도 외우고 있다.
어느 날 길재는 한 필의 말을 타고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찾아갔다. 개성의 산과 강, 자연의 모습은 고려가 망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지만 당시 함께 벼슬을 하고 학문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번화하던 거리는 어느덧 황폐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으니 길재는 그 서운한 마음을 이 한 편의 시조로 노래한 것이다. 야은 길재로 말할 것 같으면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여 관직에 오르고 학문이 깊었던 학자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 말 3대 문호라 하여 '삼은'으로 불린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역사를 보면 고려 말은 새로운 시대와 인물을 잉태한 시기였다. 여말선초,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모두 그 역할들이 있었고 의미가 있었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과 도읍지의 의미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도읍지로 천도할 필요성이 있었고 결국 고려의 궁궐이 있던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한양은 한강의 북쪽이라는 의미도 있다.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고대 지명으로 보면 漢江 또는 漢水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라 안의 강 이름을 굳이 한나라 한(漢)자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에는 실제로 漢水(江)라는 강이 있다. 양쯔강(揚子江)의 가장 중요한 지류이다. 고대 한민족은 이동하게 되면 이동하기 전의 환경과 유사한 곳에 터를 잡고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내의 한강도 고대 한민족이 사용하던 옛 지명을 그대로 가져와서 쓴 것은 아닐까.

지금의 서울은 고려의 남경이자 조선의 한양에서 비롯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 28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완료하게 되는데 이를 기념하여 서울시는 이 날을 ‘서울시민의 날’로 제정하였다. 한양은 조선시대 때에는 한성부, 대일항쟁기 때는 경성부, 광복이후에는 서울시로 불린다. 물론 조선시대 당시에도 한성부를 한양이라고도 불렀다.

한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집을 지을 때 풍수를 따져 집을 배치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배산임수’라는 것이다. 뒤에는 산이 있어 추위와 바람을 막아 주고, 앞에는 하천이 흘러 비옥한 토지를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 도읍지도 원칙적으로 ‘배산임수’를 기준으로 해서 도읍지를 정했다.

도읍지란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중심이 되는 땅으로 각 시대의 정치·경제·문화가 집약된 곳이자 영광과 고난의 기억이 응집된 곳이기도 하다.

역사 속 도읍지의 문화적 특성

역사 속 도읍지였던 장소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도읍지는 주로 농사를 짓기 좋도록 강을 끼고 있고, 외적을 막기 위해 산맥을 끼고 있기도 했다. 도읍지를 정하고 옮긴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한국사의 큰 줄기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 속 도읍지와 그 도읍지에 남아있는 문화재를 통해 도읍지가 갖고 있는 문화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도읍지는 한 나라의 중심지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저물어간 나라들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갖고 번영했다. 이런 도읍지가 자리 잡은 도시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었을까? 농사를 짓기 좋고 물길로 교통이 활발한 강가는 도읍지가 들어서기 좋은 자리다. 또 군사적인 이유로 도읍지를 정하기도 한다.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자리거나, 전쟁 중 임시 도읍지를 바다 건너에 만들기도 한다.

고대 한민족은 이동 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국경과 중심지는 다르다. 도읍지는 중심지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강역은 요동지역이었다. 요동은 고조선시대 때는 난하의 동쪽이었고, 고구려시대 때는 대릉하 혹은 요하의 동쪽이었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지금의 조양지역이었고, 고구려의 중심지는 요양지역으로 패수에서 배를 타면 낙양까지 가고 한강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 역사 속 평양, 패수, 요수(압록수)는 시대에 따라 다른 곳을 뜻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민족이 기후변화나 전쟁 등의 사유로 거주 지역을 옮기는 경우, 원래 살던 지역의 주거 환경과 닮은 지역을 찾게 되고 그렇게 해서 정착하고 나면 원래 살던 지역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는 동일한 지명이 여러 곳 나오는 것이다.

역사 속 도읍지로서의 평양

고대 평양도 뒤쪽에 있는 큰 산과 앞쪽에 있는 큰 강이 있는 대평원을 도읍지로 할 만 하다고 해서 평양이라고 명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대 평양은 고유 명사라기보다는 도읍지로 할 만한 넓은 평야지역을 일컬었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 단군조선 건국기록에,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라고 해서 단군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성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삼국사기』 기록에 동천왕이 옮긴 도읍지인 평양성이 ‘선인왕검의 택지’라고 해서 바로 단군왕검의 도읍지가 평양성이었음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 기록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하고 임금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 천리나 되었다.”라고 해서 위만국의 도읍지가 왕검성인데, 곧 평양성을 말한다.

고구려 시대 중국 역사서인 『수서』, 『구당서』, 『신당서』 의 기록과 후대 역사서인 『요사』 등의 기록을 토대로 한 최근 고구려 평양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시대 도읍지로서의 평양 천도는 동천왕의 평양성, 장수왕의 평양, 평원왕의 장안성 3번에 걸쳐 이루어 졌다. 동천왕의 평양성은 지금의 환인지역이며, 장수왕의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고, 평원왕의 장안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로 최소한 한반도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 도읍지는 요동과 만주지역에 있었으며, 동천왕 이후부터 고구려 도읍지는 평양으로 불리며, 패수도 도읍지에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압록강은 압록수라고도 하고 마자수라고도 하는데 모두 지금의 요하를 뜻하며, 평양은 도읍지를, 패수는 도읍지를 흐르는 강을 각각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쓰여 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도읍지를 통해서 역사계승의식을 강화하였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평양은 역사적 사실 외에도 남다른 감정이 작용하는 곳이다. 고조선의 도읍지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로 당나라에게 패망하면서 북방지역의 거점을 잃어버린 아쉬움과 한이 서려 있는 곳으로 고려시대 이후 고토 회복의 동기를 부여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역사왜곡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여 고대 평양을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설정함으로써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 비정한다거나, 민족의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패수는 중국 한족과 우리 민족 간의 경계를 뜻하거나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지역경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조선 시기의 패수는 지금의 난하나 대릉하를 뜻하고, 고구려 시기에는 압록수, 즉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일한 요하를 두고 고구려인들은 압록수라고 불렀고, 말갈인들은 마자수라고 불렀으며, 중국 한족들은 요하라고 불렀던 것이다. 요하는 요수라고도 불렀고, 중국 한족 기준으로 보면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민족과 구분하기 위한 자연 경계로서의 강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경계로 요동과 요서로 나뉘어 졌으며, 전쟁과 그로 인한 한군현 설치 등으로 인하여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경계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난하 혹은 대릉하에서 요하로 바뀌면서 요동과 요서의 지역개념도 바뀌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서 요동은 각별한 곳이었다.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왕검성이 있었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평양성과 발해의 수도였던 중경 현덕부 그리고 낙랑군의 조선현과 현도군의 고구려현도 모두 요동에 있었다. 그 중심에 항상 평양이 존재했다.

그런가하면 고구려 동천왕 때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데, 이때의 평양을 두고 『삼국사기』 기록에 ‘선인왕검의 택지’임을 앞서 확인하였다. 여기서 선인왕검은 단군왕검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분명 고조선을 계승하고자 했던 고구려의 건국이념이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발해와 고려까지도 이어진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서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을 도읍지로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발해 3대 문왕 때 옮긴 도읍지, 중경현덕부다. 이것은 발해 5경 중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발해와 함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고려 때는 고구려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계승하였고, 국호 반영, 서희와 소손녕 간의 담판 내용,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도읍지라는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역사적인 친연성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요사 지리지』나 『원사 지리지』 등에도 고구려 평양이 요양에 있었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옛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정사 중 『요사』와 『금사』는 중국 한족이 아니라 원나라 때 몽고인에 의해 쓰여 졌다. 그래서 중국이나 국내 일부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요사』와 『금사』의 기록을 무시하거나 배제해 왔었다. 하지만 역설로 중국 한족이 아니고 같은 북방민족이 쓴 역사서이기 때문에 더 객관적이거나 정확한 내용을 쓸 수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의 요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중심지였고,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이 있었으며, 고구려 건국시기이전부터 존재했던 말갈은 역시 그 지역에 존재하면서 고구려의 구성원이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발해 3대 문왕은 장수왕 때 고구려 도읍지였던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그곳이 발해 5경 중 하나인 중경현덕부이다.

이와 같이 ‘평양’이라는 고대 도읍지의 위치를 통해 고구려, 말갈, 발해의 관계를 헤아려 볼 수가 있다. 또한 같은 지리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역사적인 친연관계를 더 확고히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저서 『조선사연구초』 「평양패수고」에서 “지금의 패수인 대동강을 옛날의 패수로 알고, 지금의 평양인 평안남도 중심도시를 옛 평양으로 알면 평양의 역사를 잘못 알 뿐 아니라, 곧 조선의 역사를 잘못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젠 우리 역사학계도 정신 차리고 중국 및 일본 학자들의 연구결과만을 답습하지 말고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대조하면서 분석한다면 중국이나 일본이 제시한 결과들을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고구려 도읍지인 평양, 시대에 따라 그 위치는 달랐어도 천하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펼쳤던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꿈이 오롯이 담겨져 있었다. 고대 도읍지, 지나간 고대 역사가 아니고 현재의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 도읍지에 담겨진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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