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역사 터널을 지나면 서울이 보인다
근대 역사 터널을 지나면 서울이 보인다
  • 민성욱 박사
  • k-sprit@naver.com
  • 승인 2020.02.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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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민성욱 박사

지난 1월에 부산에 사는 동생 가족이 방학을 맞이하여 1박2일 여정으로 서울 나들이를 하러 올라 왔다. 첫날은 창덕궁과 경복궁 등 우리나라 궁궐을 중심으로 동생 가족이 알아서 둘러보고, 2일차에는 근·현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서울 시내 역사 유적지를 내가 안내해 주기로 하였다. 조카들이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라 자연스레 서울 역사 유적지 탐방이 되었다. 덕분에 나도 서울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모든 역사는 길 위에서 시작하고 또 그 길은 오래 동안 남아 스토리로 기억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길을 걷게 되면 기억된 스토리가 오늘에 되살아나 역사의 현장이 되어 준다. 조선시대 궁궐은 보았으니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아름다운 궁궐을 보유했던 조선의 도읍지, 한양이 어떻게 근대 역사의 터널을 지나 지금의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숙박 장소가 명동이어서 명동과 가까운 남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명동(明洞)은 말 뜻 그대로 밝고 화려한 동네로 일제가 충무로와 함께 상업지구로 개발한 곳이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였고 지금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남산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나 산책로만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일본의 대조선 침략 거점이었고 남산 주변에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던 왜성대와 그들을 위해 만든 한양공원이 있었다. 남산 기슭 아래 지금의 용산에는 일본의 조선 주둔군 본부가 있었고, 식민지 통치를 위한 통감부와 총독부 그리고 일본의 정신을 조선인에게 주입시키기 위하여 조선침략의 마침표 같은 13만평 규모의 조선신궁을 건설하였다. 특히 조선신궁은 여의도 공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큰 규모였다.

이어서 골동품 골목과 같은 전통문화거리로 인식되곤 하지만 대일항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인사동을 가기로 하였다. 인사동의 명칭은 한성부의 관인방과 대사동의 가운데 글자인 인과 사를 따서 부른 것이다. 원래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해서 대사동(大寺洞)이라고 하였고, 그 마을에 ‘한성부 관인방’이라는 관청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역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인사동에 이르는 길에는 서울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간 삼일항쟁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에는 남산 길에서 만나는 서울의 역사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명동역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에 우리나라 궁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유교의 철학과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고,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인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기초로 하였다. 먼저 전통 풍수인 배산임수를 따르고 있는데, 뒤로는 북악산과 북한산이 있고, 앞에는 한강이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도읍지로는 최적화된 곳이다. 그 안에 4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있고 중앙에는 보신각이 있다. 각각의 이름에 유교의 기본 덕목인 오상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궁궐은 궁과 궐을 합친 말로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궁과 왕과 신하가 사무를 보는 궐로 나뉜다. 우리나라 궁궐은 이궁(二宮)체제로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이 있고, 태종 이래로 창덕궁이 주궁이 되었으며 별궁으로 창경궁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경운궁(덕수궁), 경희궁이 건립되는 등 오궁(五宮)체제를 갖추게 된다. 1866년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는 경복궁 복원공사를 통해 경복궁이 다시 주궁이 되었다.

“창덕궁이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에 순응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카들에게 우리나라 궁궐 이야기를 들려 준 후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나라 궁궐 중 창덕궁은 세계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와 우리나라 궁궐의 정문은 건축구조상 남향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남문이 정문이 된다. 그런데 정문의 이름에 공통으로 ‘화(化)’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의미에 관해서 질문했는데 아무래도 조카들에게는 어려울 것 같아서 답을 해 주었다. 우선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고 자연친화적인 구성과 배치로 아름다운 정원 같은 아늑하고 포근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문인 돈화문에서 정전인 인정전까지 일자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자연친화적으로 배치하기 위하여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들어갈 때 두 번이나 꺾여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왕과 관료들은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솔선수범하며 언행을 주의하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건축구조 상 남향으로 집을 짓기 때문에 정문이 남문이 되고 앞산은 남산이 된다. 그래서 애국가 2절 가사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서울의 남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앞산인 남산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궁궐들도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정문 또한 남문이 된다. 각 궁궐별로 정문을 살펴보면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은 홍화문, 덕수궁(경운궁)은 인화문, 경희궁은 흥화문으로 모두 화(化)자가 들어가 있다. 여기서 화(化)는 ‘가르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궁궐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잘 교화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왕을 비롯한 관료들 또한 교화의 대상임을 알고 솔선수범하며 스스로 삼가 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에 와서도 유효하다.

“남산에는 국치의 길과 대일항쟁의 길이 병존한다.”

남산에는 국치의 길과 대일항쟁의 길이 병존한다. 1910년 경술년 병탄조약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인 ‘한국통감 관저’ 터를 시작으로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조선총독부’ 터, 러일전쟁 승리를 이끈 노기 마레스키를 기렸던 ‘노기신사’ 터, 청일전쟁 승전기념으로 일제가 세운 ‘갑오역기념비’ 터, 일제가 강요한 일본 국가 종교 시설인 ‘경성신사’ 터,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성한 ‘한양공원’ 터와 ‘조선신궁’ 터까지 총 1.7km 구간을 서울시가 대일항쟁시대의 역사가 담긴 남산 예장자락 역사탐방로로 조성하면서 ‘국치길’이라 이름 붙였다.

“한국통감 관저 터 → 조선총독부 터 → 노기신사 터 → 갑오역기념비 터 → 경성신사 터 → 한양공원 비석 → 조선신궁 터”

“반감이 있다고 해서 역사를 넘을 수가 없고,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지하철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남산 길을 오르다 보면 대한적십자 본부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길로 접어들면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있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울유스호스텔 입구에 해당하는 숲길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첫 번째 방문지이다.

반감이 있다고 해서 역사를 넘을 수가 없다.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조성된 이 터는 민족반역자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이 한일강제합병조약을 체결한 통감 관저 터다. 이 땅에 식민시대가 시작된 국치의 현장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기억의 터’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외치신 할머니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깃들도록 하는 배움의 장이자 사색의 터가 되어야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기억의 터’는 대지의 눈, 통감관저 비석, 거꾸로 세운 동상, 세상의 배꼽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의 배꼽은 모성으로 세상을 보듬는다는 의미로, 둥근 돌(배꼽)에 윤석남 화가의 그림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문구를 한글,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새겨 놓았다. 대지의 눈은 총길이 12m, 높이 2m의 오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목하게 들어간 벽면과 눈 형상이 서로 조응하며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터’는 경술국치 ‘치욕의 공간’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기억하는 ‘추모와 역사’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역발상을 통해 2016년 8월 서울시 주도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는데, 일제는 주한일본공사로서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던 하야시 곤스케의 공을 인정하여 그의 동상을 통감 관저 앞에 설치했다. 광복 후에 사라진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우면서 치욕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광복이후에는 한국통감 관저 터에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가 들어섰고 민주인사들에게 온갖 고문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서울유스호스텔이 자리하고 있고 ‘남산 인권 숲’으로 불린다. 세월은 흘러 다른 것은 다 사라졌어도 수령이 400년 이상이 된 은행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 나무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지금도 이 땅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의 터’를 지나 남산 자락을 따라 걷노라면 지금은 명동역 인근으로 이전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터가 나오는 데 이곳은 일제가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에 설치한 한국통감부 터이다. 이토 히로부미 등이 통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우리의 주권을 탈취하는 공작을 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통감부 청사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에 경복궁 안으로 이전하였다. 대한제국 때에는 일본 공사관이기도 하였고, 현재는 남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다음은 리라초등학교와 숭의여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리라초등학교 내 남산원에는 노기신사 터가, 숭의여대 교내에는 경성신사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노기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키를 모시는 신사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기점이 되었기 때문에 남산에 노기신사를 건립하고 노기 마레스키를 숭배하도록 했다. 경성신사는 침략전쟁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일본 내 이세 신궁에서 신체 일부를 가져와 만든 신사다. 당시 숭의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해 지진 폐교했고, 광복이후 1953년 경성신사 터 위에 다시 숭의학교를 세웠다.

노기신사 터는 리라초등학교 교정 깊숙한 곳에 있는 데다 표석조차 없어 ‘국치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한 곳이다. 리라초등학교는 국내 대표적인 사립명문초등학교로 교육과 자녀 사랑에 남달랐던 설립자가 1965년 큰딸 ‘권리라’양의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이름도 ‘리라’양의 이름으로 하였다. 2015년부터는 권리라 씨가 리라초등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남산의 정상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목에는 남산 돈가스 거리가 있다. 남산을 오게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남산 왕돈가스 집이 즐비해 있다. 남산 돈가스 거리는 1977년 처음 생길 때는 택시기사들을 위하여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큰 접시에 돈가스와 밥과 양배추, 단무지 등을 함께 차린 것으로 한국식 돈가스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그것이 일반 시민에게도 인기를 얻으며 하나둘 생겨난 것이 오늘날의 남산 돈가스 거리다. 우리도 나름 원조라는 남산 돈가스 집에서 돈가스를 먹고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케이블카 타는 곳 위로 더 올라가면 조선신궁 터가 나오는데, 현재는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옛 어린이회관 건물),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백범 광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워진 서울 위안부 기림비가 서있다.

국치길 정점에는 당시 최대 규모의 일본 신궁이 있었으며 이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던 일제의 의도가 있었다. 대일항쟁의 시작을 알리고 이끌었던 안중근 의사와 백범 김구와 같은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케이블카를 타고 도착한 남산의 정상에는 N서울타워가 있고 여기서 N은 남산과 새롭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남산이 서울의 얼굴이자 랜드마크가 될 만한 이유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온갖 자물쇠로 장식되어 있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남산의 명물이 되어버린 사랑의 자물쇠, 자물쇠로 채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기에 그 마음이 더 소중하다. 남산 정상에는 또 하나 봉수대가 있다. 전국의 봉화가 이곳으로 향했다. 봉화를 이용한 통신제도를 봉수제라고 하고, 봉화를 올릴 수 있도록 산봉우리에 설치해 놓은 둑을 ‘봉수대’라고 한다. 봉수대에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위급한 소식을 중앙으로 전했다. 봉화는 외적이 침입해 오거나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났을 때 한양으로 위급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평상시에는 연기나 횃불을 한 줄기 올리고 적이 국경지대에 나타나면 두 줄기, 적군이 다가오면 세 줄기, 국경을 넘어오면 네 줄기, 마지막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줄기를 올렸다. 남산 봉수대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가 다 보인다. 북쪽으로는 경복궁, 청와대, 종묘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한강과 강남이 보인다. 서울의 중심부임을 실감하게 된다.

남산을 오르다 보면 느끼는 것이 일본인들의 흔적이 많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조선을 강탈하려고 했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강화도 조약 이후에 삼포개항이 되자 제물포, 즉 지금의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왔고 당시 남산 아래 지금의 충무로 지역에 많이 거주하였다. 충무로 지역이 차게 되자 명동지역까지 확장하여 거주하게 된다. 그러면서 또 다른 남산 아래 용산에는 조선침략을 위한 일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남산에는 왜성대라는 곳이 있어 1885년에 한양 도성 내에 일본인 거류가 허용된 이후, 이들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마시타 나가모리 등이 주둔한 데서, 그 이름을 왜성대 또는 왜장터 등으로 불렀다. 왜성대는 조선시대의 지명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 1가에 걸쳐 있던 지역을 가리킨다. 본래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인 무예장이 있었으며, 이를 줄여 예장 또는 예장골이라 하였던 지역이다.

“고대에도 지금의 서울지역은 남다른 면이 많았다.”

지금은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임이 너무나 자명하지만 역사를 보면 언제부터 서울이 도읍지 역할을 하였을까.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는 4경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제1도읍지는 왕성이 있었던 개경이었고, 고구려 도읍지였던 평양을 서경, 신라 도읍지였던 경주를 동경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서울을 남경이라 하였다. 고려왕조의 도읍지인 개경(개성)에서 개국한 조선왕조는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멀지 않은 강화도에 단군 신앙이 있는 참성단이 있어서 건국이념을 살리기에 좋았고, 두 번째, 한반도의 중앙부에 있어 수도의 위치로 적합하였으며, 세 번째, 사방이 험준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수도를 지키기에 알맞았고, 네 번째, 넓은 들판이 있어 생산물이 풍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온조왕이 이곳을 도읍지로 정한 이래로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며, 결국 신라가 최종적으로 이곳을 쟁취하면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래서 서울이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6000년 전 한강변에 정착한 빗살무늬토기인들의 선택은 서울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6000년 전 한강변을 선택한 암사동 신석기인은 비교적 쉽게 식량자원을 얻으며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한강유역은 신석기시대 이후로 백제의 한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양, 그리고 대한민국의 서울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암사동 신석기인의 선택은 서울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길 위에는 스토리가 있고 역사가 숨겨져 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그렇듯이 길이 생겨나고 그 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길 위에는 스토리가 있고 역사가 숨겨져 있다. 길을 걸으며 오랜 기간 점철되어 있는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다 보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찾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남산에는 터널이 많다. 서울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남산터널, 마치 근대 역사 터널을 지나 한양도성 밖 새로운 서울 중심지, 강남을 만나는 듯하다.

파란만장했던 근대, 그 역사의 터널을 지나온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존재가 된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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