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을 전후로 코로나19상황이 악화되어 서울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었다. 그렇다면 과거 한양에서는 전염병이 유행하면 어떻게 했을까?

서울역사편찬원이 최근 발간한 대중교양서 《서울 사람들의 생로병사》10권에는 조선시대 한양에 살던 사람들의 출산, 육아, 은퇴, 질병, 건강관리, 죽음의 공간 등 13개 주제로 당시 모습을 기술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발간한 대중교양서 《서울 사람들의 생로병사》10권. [사진=서울시]
서울역사편찬원이 발간한 대중교양서 《서울 사람들의 생로병사》10권. [사진=서울시]

생로병사 중 ‘병病’편에는 한양에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 상황도 나와 있다. 우선 조선시대에도 질병의 최전선에 의료인이 있었다. 왕실은 내의원을 두어 왕실과 종친의 의료를 담당하고, 의술교육을 하는 전의감을 두었다.

궁 밖 백성들의 질병은 ‘혜민서’에서 다루었다. 성리학 시대라 남녀가 유별하므로 여성 진료를 담당하는 의녀가 있었다. 의녀는 진맥과 침, 뜸, 약 처방 등 전문성을 갖춘 의료인이었다.

이 책에는 서울에서 유행했던 전염병도 다루었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알지 못했던 당시 ‘역려, 역병’ 등으로 불리었으며, 특히 사람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던 것은 홍역과 괴질로 불린 콜레라였다. 콜레라는 걸리면 호랑이가 물어뜯는 고통을 준다고 ‘호열자虎列刺’라고도 불렸다.

전염병은 특성상 인구가 밀집한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쉽기 때문에 개항기 서울에서도 여러 차례 유행했다. 당시에도 감염병의 유행을 막기 위해 검역소를 설치하여 환자를 격리수용하고, 끓인 물을 먹이고, 소독과 청소를 했다. ‘검역규칙’, ‘온역장정’ 등을 두어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역행정을 시행하기도 했다. 지금의 질병관리본부가 하는 일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책에서 ‘생生’편에는 출산과 육아, 장애 등을 소재로 다루었다. 조선시대 초산연령이 낮아 출산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사례가 많아 출산 후 몸을 회복하기 위한 산후조리가 중요했다. 《갑술이월삼칠일갱반소용》이란 책에는 왕실여성들이 삼칠일동안 먹었던 산후조리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말린 고등어인 ‘강고도리’로 국물을 우린 뒤 새우나 홍합을 넣은 미역국인 ‘화반곽탕’은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이외에도 손자를 위해 질병을 공부하고 약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이 담긴 유만주의 《흥영》, 이문건의 《묵재일기》 등을 소개했다.

마지막 ‘사死’편에는 사대문 안에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기에 광희문, 서소문을 통해 성 밖으로 시신을 내보내고, 백성 대부분은 도성 외곽 산지에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도 다루었다. 그런데 공동묘지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공동묘지는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묘지화장장매잡급취체규칙’을 발표하면서부터 생겼다. 조선총독부가 인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사유지라고 묘지를 설치할 수 없게 하고, 화장을 합법화 했다. 즉 죽음의 공간마저 통제되었던 것이다.

이번 서울역사강좌 10권 《서울 사람들의 생로병사》는 320페이지 분량으로, 구입은 서울책방 및 온라인(https://store.seoul.go.kr)에서 1만 원에 구매할 수 있다. 서울시 각 도서관에는 무상 배포 예정이다.

서울역사강좌 제10권을 교재로 진행하는 2020년 하반기 서울역사강좌는 8월 21일부터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