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고속버스를 탔다. 1시간 30분을 달려 공주터미널에 도착했다.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100번대 버스를 타니 ‘금강’을 지나 중동사거리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행인을 잡고 ‘공주문화원’을 물어보니 상세히 알려주었다.

10분을 걸었을까? 공주문화원과 공주우체국 안내판이 보였다. 오른쪽 골목으로 5분 정도 걸으니 문화원 사거리에서 윤석조 단군성조봉향회장(85)을 만났다.

봉향회 사무실은 따로 있지는 않았다. 인근 건물의 3층 사무실로 이동했다. 윤 회장은 공주숭모회에서 제작한 숭모지와 단군성전 앨범을 꺼냈다. 그는 타지에서 성전을 방문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금강이 흐르고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문화의 땅, 공주에 자리한 단군성전은 어떻게 건립된 것일까?

▲ 공주 봉황산 단군성전(사진=윤한주 기자)

정부와 시민단체가 추진한 단군성전건립운동

<공주시지> 에 따르면 “공주의 유생들은 항상 단군제향을 논의하다가 1964년(단기 4297년)부터 단군성조봉향회(당시 회장 박윤교朴允敎)를 조직해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개천제를 봉향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날 공주시 문화재과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단군성전은) 문화재가 아니다. 향토문화유적이나 지역의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충효열 유적으로 지정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봉향회원들은 왜 1960년대 단군성조 건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일까? 당시는 해방 이후도 아니고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때가 아닌가? 궁금했다.

현재 단군성전은 공주시내 구 도심인 강남을 동서로 관통하는 무녕로(武寧路)와 봉황산 사이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시작은 봉황산이 아니었다. 숭모지에 따르면 “1966년 공산성에 설단(設壇=단을 만듦)하고 개천제전을 거행했다”라고 밝혔다.

▲ 공주 봉황산에 있던 단군성조신단의 모습이다. 현재 단군성전이 건립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사진=단군성조봉향회)

이듬해 봉향회는 단군성전건립운동을 벌인다. 당시 취지문을 살펴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역사적인 단기 4300년을 기념하는 개천절을 기하여 단군성전(檀君聖殿, 開天宮)을 건립하고 개천절에 봉제할 수 있도록 거시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국조의 성덕을 추모하여 민족정기를 선양함으로써 국가사회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운동에는 박윤교 회장을 비롯해 임원 50여 명이 함께했다. 또 다른 명단에는 정치계, 교육계, 문화계 인사들이 있었다. 이 중에는 안호상 박사(초대 문교부 장관)가 있어 주목된다.

안 박사는 단기 4300년(1967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해, 단군성전 건립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단군전 건립을 지시했다. 1억 원의 정부보조와 국민성금으로 3개년 계획으로 추진했다.

정부와 시민단체의 단군전 건립운동이 지역에도 파급이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 현재 단군성전 오른쪽에 자리한 단군성전 신단이다. (사진=윤한주 기자)

37년 만에 거둔 역사적인 ‘쾌거’

단군성전 건립운동은 쉽지 않았다. 정부가 추진했던 성전 건립계획도 ‘단군은 우상’이라는 이유를 내건 기독교의 반발로 무산됐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야 했다.

1981년 서상모․이공권 회장은 공주군(현 공주시), 공주향교, 봉사단체의 지원을 받고 봉황산에 단군성조신단이 건립했다고 밝혔다.

신단비문에는 “군민郡民 다수가 힘을 합했고 김석순(金錫順) 씨가 비(碑)와 상석(床石)을 공헌(貢獻)하고 본군(本郡) 이병오 군수께서 장(墻)을 마련했다”라며 “지역봉사단체에서도 협조가 지대했다. 이복문, 권오중, 김석순 선생의 적극 주선으로 오늘의 완전한 단소가 이루어졌다”라고 밝혔다.

이어 1998년 9월 6일 조태복 회장은 단군성전 기공식을 개최한다. 3년 만인 2001년 10월 3일 개천절에 드디어 준공식이 거행됐다. 봉향회가 조직되고 37년 만에 거둔 역사적인 쾌거였다.

▲ 2001년 10월 3일 공주 봉황산에 단군성전이 건립됐다. 조태복 단군성조봉향회장이 준공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단군성조봉향회)

성전규모는 전면적 3,000평이고 부지는 660평이다. 홍살문, 담장, 주차장 등을 구축했다. 당시 이사로 참여했던 윤 회장은 “성전 건립비용으로 10억 원은 들어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단군성전이 건립되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다. 역대 봉향회장과 회원, 공주시장과 시민들이 그들이다. 정부도 포기한 단군성전건립을 민관이 합동으로 일궈낸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2014년 5월,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올해가 단군성조봉향회 성립 50년이다. 당시 단군성전건립취지문을 다시 읽어본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001년 10월 3일 공주 봉황산에 단군성전이 건립됐다. 당시 준공식이다.(사진=단군성조봉향회)

“개천절의 축전은 하나의 의식적인 행사에 불과하며 민족정기는 날로 퇴폐(頹廢)하여짐을 볼 때 이 나라 민족으로서는 통탄불금(痛嘆不禁)입니다.

타민족들이 우리나라를 군자예의국이라고 호칭하며 대인국(大人國)이라고 하여 왔는데 우리 민족은 우리의 국조단군(國祖檀君)의 성덕을 어찌 망각하겠는가?

우리는 성조의 위대한 은덕을 높이 선양하고 민족정기를 발휘하여 혼탁한 이 사회를 정화하며 국가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방금 거국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를 알았으니 단군성전을 가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