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뒤쪽에 자리한 단군성전 내 단군왕검(제공=현정회)

1920년대 일제는 남산이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인왕산으로 옮긴다. 그 자리에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조선신궁’을 건립한다. 일본의 국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기리는 곳으로 바뀐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세운 국사당이 쫓겨난 것은 한일병탄의 운명이었다.

당시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민족의 국조인 단군(檀君)을 모셔야 한다는 의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단군성지인 강화도 마니산의 우물을 막아버린 것도 일제였다. 한민족은 몸도 빼앗기고 정신도 빼앗긴 형국이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단군유적인 단군성전과 단군굴은 이러한 일제의 정신적 침탈에 맞서 건립한 것이다.

먼저 단군성전은 서울 종로구 사직단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숙봉(李淑鳯, 1917~1996) 여사는 대일항쟁기 부친인 이한철 옹의 뜻을 받아 천안시 북면 오곡리에서 단군제사를 숨어서 지냈다. 해방되자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에 단군제단을 설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여의치 않았다. 이숙봉 여사는 이정봉, 이희수 등 세 자매가 주축이 돼 1968년 단군성전을 건립했다. 이어 현정회로 이관하고 서울시에 기부했다. 1973년 서울시보호문화재로 지정됐다. 1977년 신상균(申尙均)이 조각한 국민경모 단군상을 봉안했다.

단군성전은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정문 맞은편 지하 1층 계단으로 내려가면 현정회 사무실이 있다. 현재 고故 이숙봉 여사의 아들인 이건봉 사무총장이 상주하고 있다. 매년 3월 15일 단군이 승하한 어천절과 10월 3일 개천절에 제례를 올린다. 단군성전은 설날과 추석, 단오 등 명절에도 참배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이 총장의 말이다. 그래서 성전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이어 지하단군전으로 불리는 단군굴(檀君窟)은 1957년 서울 남산에 건립됐다.

이강오 전북대 명예교수는 <한국신흥종교총람>에서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박효달은 1943년부터 일제의 눈을 피해 집 벽장 속에 단군을 모셨다”라며 “박 씨는 일제 때 신사를 짓고 한민족으로 하여금 참배, 신봉을 강요한 일을 생각해서라도 국조를 받드는 단군전을 세워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밝혔다.

단군굴은 남산 식물원을 뒤로 돌아 순환도로로 내려가는 산책길 오른편에 있었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돌 위에 단군상이 있고 옆으로 환웅상 맞은편에 수만 명의 이름이 씌어있는 우국지사의 영위가 늘어져있었다. 매년 개천절과 어천절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2006년 단군굴은 철거됐다. 국유지에 무단으로 점거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동안 남산공원관리사무소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 암묵적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박효달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이 지켜왔으나 2006년 서울시로부터 철거됐다. 현재 단군굴이라고 이름을 새긴 돌만이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 서울 남산, 15미터 단군상 건립 무산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단군전 건립을 지시했다. 당시 1억원의 정부보조와 국민성금으로 3개년 계획으로 추진하려고 했다. 부지는 서울 남산 공원의 조선신궁(朝鮮神宮) 자리였다. 높이만 50척(15m)에 이르는 단군동상이었다. 사단법인 단군숭명회 주관으로 건립하려던 계획은 기독교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어 1985년 서울시는 올림픽을 앞두고 사직공원 내 단군전을 확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기독교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그해 조선일보(8월 7일)는 여론조사를 벌여 국민 67%가 단군성전 건립에 찬성했다고 보도했다. 20세 이상 남녀 1천 31명을 대상으로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는 개신교 신자 가운데서도 절반에 가까운 45.9%가 단군전 건립에 찬성했다. <자료=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