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학정과 갑자사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역사는 변화하고 발전하기도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도 있다. 최근 북한의 제 2인자 장성택이 돌연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놀라고 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모부가 조카에게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 어느 신문에는 옛날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죽은 고사가 가꾸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보도하였다. 

우리는 550년 전 세조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고 세조의 증손자 연산군이 국민에게 세조 이상의 만행을 저질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를 섬뜩하게 한 것은 북한의 처형방법이다. 공개리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시신을 없애 버린다고 하니 일제가 만행한 방법이며 조선시대의 부관참시 이상의 형벌이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연산군이 자기 어머니 윤비를 죽게 한 12명의 신하를 처형하는데 이미 죽은 다섯 명은 묘를 파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자르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고 하니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프랑스혁명 당시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어 나갔다. 그중 하나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녀의 목을 자르던 커다란 작두의 소리는 파리 시내까지 들려 모두가 소름을 끼쳤다. 우리도 요즘 북한에서 들려오는 공개처형 소식에 소름을 끼치고 있다. 연산군의 사화는 제2인자 숙청이 아니었으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두 번이나 일으켜 당시 사람들을 떨게 하였다. 연산군 다음 임금은 이복동생 진성대군이었는데 그도 언제 죽임을 당할까 몰라 떨면서 살았다. 옥편에 보면 사화士禍란 “옳은 말을 하는 선비들이 간악한 군주에게 당하는 참혹한 화“라고 하였으며 반정反正이란 ”난세를 바로잡아 본래의 태평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사화에는 반드시 반정이 따르는 법인데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다. 연산군은 이복동생 진성대군에게 반정 쿠데타를 당하여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아무도 모르는 죽임을 당했다.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인데 누가 그랬지 지금까지 귀신도 모른다.
 
무고한 12간奸과 스승 조지서의 죽음

연산군은 이미 어릴 때부터 악인으로서의 소질을 타고 났었다. 갑자사화를 일으켜 어머니에게 사약을 나른 선비들을 처형했을 뿐 아니라 어릴 때 자기를 엄히 가르치던 선생님 조지서(趙之瑞 1454~1504)까지 함께 처형하였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세자 때 하도 말을 듣지 않아 책을 내던지면서 “세자께서 매일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아바마마(성종)에게 이르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하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또 한 분의 선생님 허심(許琛 1444-1505)은 부드러운 말로 타일렀으므로 연산군은 벽에다 낙서하기를 "조지서는 소인이요 허심은 큰 성인이라"고 썼고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조지서부터 처형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고 말았다.

스승을 죽이는 제자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의 피 묻은 수건을 보자마자 발광하였다고 하지만 타고날 때부터 본성이 있어 그랬던 것이다. 당시의 실록 사초를 모두 읽고 관련자를 샅샅이 색출하여 죽이는데 연좌제를 적용하여 본인뿐만 아니라 일족을 모두 죽였다. 그러니 한꺼번에 수백 명이 죽어 피바다를 이룬 것이다.
 
연산군의 악정은 너무나 많아 여기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다.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 기생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예쁜 여자를 골라 대궐 안에 들여보내 흥청興淸이라 불렀다. 그래서 흥청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 흥청망청이었다. 연산군은 또 혹시 자기를 비방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모든 관원의 허리에 패를 달도록 했다. 패에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이는 칼이다“라고 썼다. 연산군 11년 만에 연산군은 혁명군에 붙들려 강화도로 유배되는데 사람들은 연산군의 정치를 “보아하니 웃기는구나. 구질구질하구나. 나라가 망하는구나.“(見笑矣盧古 仇叱盧古 敗阿盧古)하고 개탄하였다.
 
중종과 3대장에게 정의감이 없었다.

연산군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난 혁명을 중종반정이라 하는데 실은 연산군에게 신임을 받던 성희안 박원종 유순종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반정으로 추대된 중종은 연산군의 동생 진성대군이었으나 연산군처럼 겁이 많은 것은 똑같았다. 3대장에게도 무슨 혁명이념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불만에 찬 사람들의 거사였다. 성희연이 먼저 무관인 박원종을 찾아가 거사를 모의하였고 유원종이 이에 합세하였다. 셋 다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었다. 셋은 서로 손을 잡고 “우리는 평생 동지가 아닙니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합시다. 어찌 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감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일어납시다.” 이렇게 약속했다. 
 
안희정과 유순종도 모두가 연산군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인데 박원종은 무과출신으로 가장 중요한 혁명군 대장이었다. 그러나 전라도에서 올라오기로 한 군대가 미처 도착하지도 전에  거사음모가 발각되니 박종빈은 을지로 6가의 훈련장에 집합한 혁명군을 지휘하여 광화문으로 진출해야 했다. 오랫동안 휴작하고 있던 터라 물을 만난 고기처럼 부채를 휘두르면서 군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나머지는 군을 어떻게 부리는가를 모르는 문신들이었다. 박원종은 자기 누이가 연산군에게 겁탈당하여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박원종이 지휘하는 혁명군이 경복궁을 포위하였을 때 연산군은 자다가 일어나 “활과 화살을 가져 오느라”고 했으나 옆에 있던 부인이 말리기를 “무슨 힘으로 당신이 싸우겠습니까. 순순히 오랏줄을 받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하였다. 또한 그때 영의정 김수동이 혁명에 동조하여 연산군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전하! 전하께서는 인심을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소서.” 라고 권고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내가 내 죄를 안다.”고 하면서 군말 없이 항복하고 유배지 강화도로 떠나갔다.
 
한편 혁명군은 진성대군 집을 찾아가서 새 임금으로 모시려 했는데 진성대군은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부인이 현명하여 하인을 보고 밖의 동정을 살피되 병사들이 탄 말의 엉덩이가 보이는가. 얼굴이 보이는가 알아보라“ 고 일렀다. 하인이 나갔다 오더니 “병사들의 말 얼굴은 보이지 않고 엉덩이만 보입니다.” 고 아뢰었다. 부인은 남편을 보고 “여보! 안심하고 내려오세요. 병사들이 우리 집을 지키러 온 것입니다.” 그날 12시에야 병사들이 주는 군복을 입고 수례에 타고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만세 만세”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기뻐했다.

중정반정은 이렇게 쉽게 끝났으나 그 뒤가 중요하다. 연산군이나 중종이나 특히 박원종에게 혁명정신이 없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지방에서는 가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길을 막았다. 최근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이런 것이 아닌가 안타깝기만 하다.      

수수방관 발만 동동 구를 것이 아니라 도와주라는 이야기인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구나. 하다못해 박원종의 중정반정 같은 쿠데타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보아하니 웃기는구나. 구질구질하구나. 그냥 두어도 북한이 망하는구나.”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