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을 모르는 후손은 없다. 만일 기억이 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부모 없는 고아처럼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조상도 모르고 살아가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면 국조인 ‘단군왕검’의 제삿날은? 답을 알고 있다면 국학인(國學人)이 분명하다.

그런데, 길을 가는 중학생을 붙잡고 단군이 언제 돌아가셨느냐고 물어보라. 모른다고 하거나 엉뚱하게 건국일(10월 3일)을 답할 것이다.

국학(國學)이 어렵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 ‘국조 이야기story’라고 하면 어떠할까? 기독교, 불교, 유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선도문화라고 하니, 그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지난 14일 청원군 은적산 단군성전에서 어천절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김우종 청원군수권한대행을 비롯해 집전자들이 제를 지내기 위해 홍익문으로 들어가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단군 할아버지를 추모하다

지난 14일 어천절을 맞아 충북 은적산 단군성전에는 2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단군의 유산인 ‘홍익인간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석했다.

어천절의 기원은 유학자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 선도(仙道) 역사서에서 찾을 수 있다.

“3월 15일에 단군왕검이 봉정 蓬亭에서 붕하니 교외郊外 십리의 땅에 장사지냈다. 모든 백성들이 마치 부모상父母喪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여 단기檀旂(단군왕검의 깃발)를 받들어 아침 저녁으로 합좌合坐하고 경배敬拜하며 늘 생각하여 마음에서 잊지 않았다.

是歲三月十五日 帝崩于蓬亭 葬于郊外十里之地
萬姓如喪考 奉檀旂 晨夕合坐敬拜 常念不忘于懷
- 단군세기”

천자의 죽음을 ‘붕(崩)’이라고 표현한다. 1대 단군 왕검은 93년 동안 조선을 다스렸고 130세로 장수했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에서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단군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로 비견되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였다고 밝혔다.

또한 기독교 장로로 알려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상해 임시정부 어천절 행사에서 “단군 황조의 뜻을 계승하겠다”라고 경축했다.

▲ 지난 14일 청원군 은적산 단군성전에서 국조단군청원·청주봉찬회 주관으로 어천절 행사가 열리고 있다. 천제상에 흰 소머리가 올려져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흰 소머리’의 정체는?

이날 국조단군청원·청주봉찬회 주관으로 진행한 어천절은 기념식과 개천대제(開天大祭) 제향으로 진행됐다. 초헌관은 김우종 청원군수권한대행이 맡았다. 대제는 유교식으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천제상에 올라온 ‘흰 소머리’가 눈에 띄었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단군문화기행>에서 “단군문화의 핵심이 하늘에 올리는 천신제天神祭”라며 “천신제는 반드시 소머리를 바쳐야 한다. 소머리도 흰 소(白牛)의 머리를 올려야만 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백색은 숭상하는 색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제관 또한 백의(白衣)를 입어야 하고 신위를 적는 종이나 헝겊을 신폐(神幣)라고 하는데 이 또한 백면포(白綿布), 백마포(白麻布), 백지(白紙) 등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반면 은적산 단군성전은 소머리를 제외하고 유교식으로 천제상을 차렸다.

주강현 제주대학교 석좌교수는 “흰 소머리를 하늘에 바쳐 제사를 지낸 데서 백두산의 이름이 유래했다(한겨레 1995년 11월 15일)”라고 밝힌 바 있다.

▲ 지난 14일 청원군 은적산 단군성전에서 어천절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국조단군청원·청주봉찬회원과 시민이 참배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창설자 김재형…독립운동가 VS 단군성전 창설자

단군성전을 창설한 김재형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다. 김 선생은 1890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났다.『매일신보(每日申報)』 판매업을 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월 1일 광무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는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자, 거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서울에서 민족대표 박동완이 감추어 두었던 「독립선언서」 5백여 매를 받아 그중 350여 매를 연기군(燕岐郡) 조치원(鳥致院)에 사는 김재석(金在石)에게 주어 이를 문의면·미원면·보은읍 등지에 배부하도록 했다.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봉투에 넣어 강내면에 사는 조동식(趙東植)·김봉회(金鳳會)·박준평(朴準平) 등에게 배부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체포돼 이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여기까지가 국가보훈처의 기록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해방 후 ‘단군성전’을 창설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영교 회장과 전화 통화했지만, 모른다고 답했다.

반면 안동김씨대종회 누리집에는 흥미로운 자료가 검색됐다. 국가보훈처에는 기독교인으로 밝힌 김재형 선생이 “1927년 계룡산 신도안에 삼성교三聖敎를 발족하고 후에 단군교檀君敎에 입교했다”는 내용이다. 이어 “만년에는 은적산 정상에 단군성조비檀君聖祖碑와 충혼비를 건립하고 전각을 건립하다가 1966년 서거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태길 전 회장은 코리안스피릿과의 전화통화에서 “김재형 선생이 대종교 계통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다”라며 “대종교 1대 교주 홍암 나철 선생과도 연관이 있다”라고 증언했다. 대종교의 전 이름이 단군교이다. 청원군청에서 발행한 <청원군지> 하권에서도 단군봉찬회가 1945년 대종교에서 조직한 것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청원군지>에 따르면 1986년부터 주인이 뒤바뀐다. 유림에서 조직한 “국조단군봉찬회(國祖檀君奉贊會)”에서 새로운 위패와 영정을 모신 것이다. 현재 신전은 1968년에 지었지만 1974년 보수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하종국(下鍾國)이 쓴 “단군성전(檀君聖殿)”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977년에 담장을 쌓았으며 1986년에 “홍인문(弘仁門)”이라고 이름한 솟을대문을 세웠다

증평단군전은 창설자 김기석 선생공적비가 있지만, 청원단군전은 창설자 김재형 선생과 관련된 기념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