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영진 총전교(제공=대종교)

“기독교나 불교만 알았지. 4천 년 전에도 종교가 있는지 몰랐어요. 우리 민족에게도 우리의 종교가 있구나. 그런 것에 대해 확신하게 됐고 우리의 것을 알리는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중국에서 항일유적지를 찾아가면서 애국의식을 많이 느꼈고 그런 것이 보람이었습니다.”

원영진 총전교(62․사진)는 대종교에 몸담은 지 36년간의 소회를 이같이 말했다.

원 전교는 20대 젊은 시절 ‘우리는 오랜 역사가 있는데 왜 우리의 종교가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민족신앙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어 대종교를 접하게 됐다.

그는 “우리 민족이 찾았던 하느님이 기독교에서 신앙하는 하느님보다 더 과학적이고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말씀을 접하게 됐다”라며 26세에 입교한 이유를 밝혔다.

이후 일본과 중국 등 외국선교에 전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서 외래종교와 외래사상이 난무하다 보니깐 사람들이 우리 민족사상에 대해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로 생각하니 선교가 힘들었죠. 독립유적지를 돌아보고 선종사님께서 독립을 위해 흘리셨던 터전을 복원했어요. 홍암 대종사가 중국에서 독립운동과 선교활동을 했어요. 우리 교당이 100개가 있었어요. 그중에 10개 정도를 복원한 거죠.”

국혼의 횃불, 홍암 나철

지난달 14일은 홍암 나철(1864~1916) 대종사가 1909년 대종교(大倧敎)를 중광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중광절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애국자이시죠. 잃어버린 국혼을 이은 경천신앙의 지도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신앙의 횃불을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혼의 횃불이었습니다.”

나철이라고 하면 을사늑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매국노 5명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을사오적 사건’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종교에 대해서도 청산리대첩을 비롯해 무장독립운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원 전교는 나철을 국교(國敎)를 이은 종교지도자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상 사람들은 대종사를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알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국교를 부활하신 분입니다. 서양에는 예수가 있다면 동양에는 인류대속자로 홍암이 나타나셨다고 하신 분도 있습니다. 예수는 40일간 금식을 했고, 대종사는 72일간 백두산 밑 환인현에서 겨울 동안 단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종교적인) 능력을 얻으셨고 하루 동안 열병환자 42명을 고치기도 하고 가뭄 때 단비를 내리기도 하는 등 그런 기적을 많이 행하셨다고 해요. 그러한 기적을 있으니깐 짧은 시간에 30만 명의 신도를 얻으신 것이죠.”

그가 주목하는 것은 나철의 죽음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인(死因)이 있잖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대종사님은 폐기법(閉氣法)이라고, 숨을 그치는 선도(仙道) 수련법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귀천하셨어요. 또 아침 조 하늘 천이라고 조천(朝天)하셨고도 해요. 일본 헌병이 사인이 없으니 이것은 성스러운 죽음이라며 절을 하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나철이 순교한 이유는 순명삼조(殉命三條)에 있었다.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순교한다는 내용이다.

“내 몸을 대신해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이타의 정신이죠. 순명삼조가 보여주는 대속신앙은 세계종교사에서도 위대한 업적이 될 것입니다.”

▲ 대종교 105주년 중광절 기념 선의식을 올리고 있는 원영진 총전교(사진=윤한주 기자)

대종교는 단군상을 세우지 않는다, 왜?

취재를 앞두고 대종교는 단군상을 세우지 않는다는 정보가 있었다. 신도 중에 단군의 메시지를 듣고 상을 세웠다가 쫓겨난 일화도 있다는 데 사실일까?

“아니지요. 물론 상을 세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하는 사람들은 (단군) 상을 모시는 것을 좋아하세요. 기독교나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진(영정)을 좋아하세요. 대종교에서는 상을 모시다가 들어오신(입교) 분에게 굳이 상을 치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같이 모시게 합니다.”

외국인들도 대종교를 찾는지 물었다.

“1980년대이었던 것 같아요. 대종교 종리대학을 1년에 2차례 열고 있었습니다. 일본 아이누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찾아뵙겠다고. 한 4~50여 명이 왔더라고요. 자기들도 기도를 하다보니깐 조선의 시조가 단군인 것을 알고 그 제단을 찾다가 대종교를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설명하다가 강화도 마니산을 있다고 하니 그곳도 가겠다고 해서 같이 다녀왔습니다. 중국 학자들이 다녀간 적이 있고 인도에서 온 분은 마니산이 세계의 성산(聖山)이라는 말을 듣고 대종교를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의 소망은 인재양성이다.

“할 수만 있다면 대학원대학교를 만들어서 민족신학이자 국학을 가르치는 성직자 양성을 하고 싶습니다. 통일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서 옛날 독립운동할 때처럼 통일지도자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전국에 60여 교당이 있고 100여 명의 성직자들이 대종교를 알리고 있다. 성직자 되는 과정은 대종교 종리대학 과정에서 3년의 수행을 거친다고 한다. 기독교 목사처럼 결혼도 할 수 있다. 그의 임기는 2016년까지다.

“300명 양성해야죠. 또 단군께서 승하한 어천절과 개국하신 개천절을 북한과 합동으로 하는 것을 준비합니다. 남북이 단군할아버지 앞에서 천제를 올리고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 원영진 총전교

원영진 총전교는 1952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1978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어 1980년 대종교 민족재단 원주, 1981년 일본 고베지역 선교사, 1984년 총본사 시교당 전무, 1992년 해외선교 본부장(중국, 백두산, 연길 훈춘지역 역사연구소 개설) 등을 역임했다. 2007년 대종교 창립시교당 개척, 2011년 총본사 담임 선도사 등을 역임하고 2012년 6월 24일 전교회의에서 총전교가 됐다. 저서로는 단군 신앙과 생활윤리(대종교출판사1995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