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5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 옆 원구단에서 남산제례문화원(원장 신복동) 주최로 개천절 행사가 열렸다.(제공=매일종교신문)

전통의례방식으로 고증한 개천행사

지난해 11월 5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 옆 원구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날 남산제례문화원(원장 신복동) 주최로 음력 개천절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8각 3층 건물인 황궁우 중앙에는 대형 단군영정(天眞)이 걸렸고 좌우로 태극기와 천부경이 걸렸다. 남산제례문화원은 고증된 전통의례방식대로 진행된 개천축제로 봉행했다.

사전 행사로 춤꾼 김삼과 소리꾼 홍경옥의 길놀이에 이어 최정자 씨가 작곡한 천부경 노래를 불렀다.

이어 천제는 행사를 여는 개의(開儀), 한얼님께 참례분향하고 4배 올리는 참령(參靈), 한얼님께 올리는 폐백식인 전폐(奠幣), 제물을 바치는 진찬(進饌) 등으로 진행됐다.

천주식은 하늘에 감사하고 축원하는 천축문(박영록 범민족화합통일본부 총재), 하늘에 고유문을 낭독하는 천고문(이옥용 매일종교신문 발행인), 하늘에 소원을 기원하는 천원문(박명서 배달선생기념사업회 이사)에 이어 천부경  봉독(이대인 한국정보문화연구원장)이 있었다.

개천절 노래를 부르는 주악(奏樂)과 천향을 올리고 한얼님께 4배 올리는 사령(辭靈), 제천봉행식을 마치는 폐의(閉儀)로 마무리됐다.

박영록 총재는 “개천절은 우리 민족 최대의 국가행사였다. 8천만 민족은 한얼님의 천자 천손인 우리 한민족이 한 뿌리 한 형제자매임을 되새기고 나아가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를 다짐하기위해 모인 자리”라고 말했다.

장영주 국학원장(대행)은 “사직 제157호 원구단에서 봉행하는 천제를 통해 배금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조상의 뿌리를 알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소중함과 충효의 정신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제천의례 성지, ‘원구단’

원구단의 유래는 고려 성종2년(983) 정월에 “왕이 원구에서 기곡 祈穀할 새 태조로서 배향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원단圓壇에서 제천, 기우祈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학자의 반대가 심했지만, 태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원단에 제사 지내온 지 이미 오래다. 우리나라는 단군이 시조인데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다.”라고 유시를 내리고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우리나라는 중국 천자의 분봉국(分封國)이 아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개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천제를 지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464년에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지 못한다는 강압에 의해 원구제는 중단되고 만다.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고종은 원구단을 세우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이때 거행된 황제즉위식은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와 동등한 독립국임을 천명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서는 비운을 맞는다.

중국과 일본에 짓밟힌 제천의례는 지난 2008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100여 년 만에 환구대제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이어 2009년부터 삼균학회, 한민족운동단체연합, 남산제례문화원 등 민족단체에서 10월 3일 개천절 장소로 부활시켰다.

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 있는 원구단에 가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와 돌북 3개, 석조 정문만 남아있다.

황궁우는 팔각 3층 건물로 내부는 통층이고 각 면에는 3개씩의 창을 내었으며, 천장에는 쌍룡이 새겨져 있다.

쌍룡의 발톱은 7개인 칠조룡(七爪龍)인데, 이는 5개까지만 허용되던 조선시대 제후국의 지위를 넘어 황제국의 상징을 채택한 것이다.

또한 3동 지붕은 천지인 삼합일체의 천제의식을 나타낸다. 박영록 총재는 “(3동 지붕을) 우주의 진리빛인 검빛, 황금으로 장식해 온 천하를 밝힌다는 뜻”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