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천안시 목천읍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 자리한 홍암 나철 동상(사진=국학원)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羅喆 선생의 속명은 나인영羅寅永이었다. 나철과 나인영은 이명동인(異名同人)이었는데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나인영이 아직 단군을 알지 못하고 대종교를 창시하기 전인 1905년 12월 30일 눈 오는 날 밤 11시경이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내려 남대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어떤 머리가 하얀 노인이 나타나더니 “자네가 나인영이 아닌가.” 하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요, 호는 두암頭岩이라 하며 나이는 90이나 되었나 대강 그쯤 된 사람이네” 하는 것이었다. 자기 나이도 모르는 노인이고 보니 산중에서 온 도사道師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노인이 나인영(나철)에게 하는 말이

“내가 여기까지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은 백두산에 계신 우리 스승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을 받들어 이것을 자네에게 전하기 위해서네. 받아 보게 그리고 쓸데없는 일은 오늘로 집어치우게. 정신이 중요하네. 알았는가?”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허름한 보자기 하나를 쥐고 있었다. 나인영이 성큼 그 보자기를 받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고 홀연히 서대문 쪽으로 가버리는 노인의 뒤만 쳐다보았다.

이 보자기에 든 것이 6천 년 전 환웅이 남긴 신서神書, 『삼일신고三一神誥』였으니 얼마나 귀중한 보물이었나.

나인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백전노인에게서 노상봉교路上奉敎를 받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바꾸는 책이 있는데 『삼일신고』와의 만남이야말로 나인영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을 바꾸어 준 것이다. 삼일신고는 천부경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인영은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삼일신고三一神誥』가 무엇이며 『신사기神事記』가 무엇인가. 정신없는 노인이 나타나더니 나에게 귀신같은 책을 주는구나. 공연히 마음만 상한다.” 이렇게 투덜거렸다.

『삼일신고』의 원저자는 단군 이전의 환웅이었고 그것을 이어 받은 분이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 - 203)였다. 백전 노인을 만났을 때만 해도 나인영은 우리에게 민족종교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오로지 을사오적만 죽이는 일밖에 몰랐다. 실패해서 그렇지 나인영은 안중근 의사의 선배였다. 그러나 을사오적을 죽이면 제2의 을사오적이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 삼일신고(=자료)
나인영은 그 뒤『삼일신고』와『신사기』두 권의 낡은 책을 읽고 크게 깨닫고 이름을 나철로 바꾸고 대종교를 창시하였고 황해도 구월산에 가서 단군의 뒤를 따라 자진 순국하였다. 그러나 나철의 제자들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3.1운동의 기폭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31신고라는 유有 즉 일(一)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란 매일매일 신문이나 TV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허드레(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있으나 마나 한 것들이다. 아니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모아놓아도 역사가 되지 않는다. 역사는 바다 물속과 같이 천길만길 깊은 곳에 잠들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역사가 있고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다. 보이지 않는 역사는 바다 속 깊이 잠겨 흐르고 있다. 이 정신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파도만 보고 그것을 바다의 전부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의 눈은 아무리 부릅뜨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의 명을 받아 서울역까지 와서 나인영에게 전한 책은 환단시대(환국과 단국시대)부터 내려 온 우리 민족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을 나인영(나철)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잃어버린 민족정신이 3.1운동으로 나타나 광복이 된 것이다.

그냥 저절로 온 것이 아니다.「절로 절로 저절로」란 말이 있는데 절에서 절로 가면 빈손으로 가도 밥은 얻어먹는다. 그러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 역사다.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나인영이『31신고』를 받은 뒤 10년이 넘는 1919년 3월 1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1919년으로 돌아가 자세히 살펴보면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이 자칫하면 3.1운동을 일으키지 못 할뻔 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황제란 이름은 일제가 붙인 것으로 절대 불러서는 안 된다)의 인산일(因山日 임금님의 장례식)을 3월 3일로 잡았기 때문이다.

“큰일 났습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31운동을 준비하던 천도교 간부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물었다. 그러나 손병희 선생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틀 앞당겨 3월 1일로 하시지요.”라고 일렀다. 손병희 선생은 전날 꿈에 한 신선이 나타나더니 금과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玉帶)를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날 꿈에 어디를 가고 있는데 한 신선神仙이 나타나시더니 금과 옥으로 만든 소반을 주셨습니다. 이때 백여 명의 농부들이「독립가」를 불렀습니다. 이 일을 어찌 단순한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손병희 선생이 받은 선물은 신라 임금이 단군에게서 받은 허리띠 천사옥대天賜玉帶였던 것이다.

만일 손병희 선생이 천사옥대를 받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농부들이 「독립가」를 부르는 꿈을 꾸지 못했다면 3.1운동이 실패로 끝났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독립선언서를 찍는 장면이 형사보조원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다행히 한국인이었다. 그때 선생은 형사보조원을 불러 타일렀다. 당신이 평생 먹고살아도 남는 돈(5만 엔)을 줄 터이니 오늘 일을 모두 비밀로 하자고 한 것이다.

만일 헌병보조원이 손병희 선생이 주는 돈을 받지 않았다면 3.1운동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도 모두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역사 그 자체가 바뀌고 말았을 것이다.

21세기는 한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역사는 물론 세계사가 전개될 것이란 점괘가 나왔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신시배달 시대를 우리 손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삼신의 명을 따르는 순천順天의 세상이 올 것이다.

더 이상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일이 없는 무위자치無爲自治 그리고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배우는 무언자화無言自化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자연을 훼손하거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여 공생共生할 줄 모르는 세상은 사라질 것이다. 다수결을 민주주의라 속이는 세상이 가고 전원일치의 화백和白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렇게 나인영이 서울역전에서 신선에게 받은 31신고에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예언하고 있다. 손병희 선생에게 천사옥대를 준 신선(아마 단군이었을 것이다)도 3.1운동을 성공하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나. 함부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자주성을 잃었고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그 결과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고 우왕좌왕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먹던 밥을 버리고 빵과 버터를 먹는가 하면 마시던 차와 숭늉을 버리고 커피를 마시니 이래서 어떻게 21세기를 주도하겠다는 것인가.

집을 나서면 콘크리트 고층빌딩 숲 속을 걸어가게 되어 신경쇠약증에 걸리고 집안에 들어가서는 의자와 침대생활을 하여 허리를 못 쓰게 되니 우리에게 어떻게 세계를 이끌어 갈 힘이 나겠는가 말이다.

『삼일신고』신훈神訓을 다시 머리맡에 두고 정독하자.  이런 말씀이 보일 것이다.

천신은 저 높고 푸른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의 머리(뇌腦) 속에 내려와 있느니라.

그러니 하늘높이 올라갈 것도 없다. 이미 내려와 있는 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멸망 직전의 우리 역사문화를 재건하여 세계를 신시神市태평의 새 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