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동서울터미널에서 충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증평군, 청원군에 이어 충주 단군전까지 소개하면 충북 3대 단군탐방 코스가 만들어지리라 기대했다.

100분을 달려서 도착한 주덕읍  버스정류장에는 이종상 성균관유도회 주덕읍지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만나기로 했지만 비가 오는 궂은 날씨로 하루를 연기했다. 따뜻한 햇살이 촬영하기 좋은 날이었다.

이 회장의 차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했다. 단군전 근처에는 차가 2대가 더 있었다. 곽호종 전 회장(충주시의회 운영위원장을 역임, 전 시의원), 정연욱 주덕지회 총무, 한수덕 이장 등 3명이 기자를 맞이했다.

▲ 어래산 중턱에 있던 단군전은 창설자 원용선 과 함께 단군제를 지내던 유림들이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1961년에 현재의 자리(삼청리 산24-1)로 옮겼다.(사진=윤한주 기자)

마을주민의 ‘긍지’

단군문화를 탐방하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맞이하는 경우가 드물다. 놀라웠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기자가 아니라 단군전이었다.

한 이장은 “마을주민들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 단군전이 있어서 마을이 탄탄하게 나가고 있다”라며 “10월 3일 개천절을 위해 마을 주민 모두가 준비한다”라고 말했다.

삼청리는 30여 가구 대부분이 한우를 기르는 축산농가들이다. 그러나 매년 개천절을 치르기는 쉽지 않다.

“가장 바쁠 때(10월)에 이틀을 해야 돼요. 바쁜 시기에 청소하고, 손님도 많이 오니깐. (접대해야 하고). 그런데 마을이 발전하려면 자꾸 모여야 하거든요. 같이 대화도 나누고 밥도 먹고”

한 이장은 단군전이 마을 주민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으로 본다. 그의 생각은 단군전을 창설한 유학자 원용선(元容璿)으로 이어진다.

▲ 유학자 원용선은 1948년 5월 5일 조선개국단군성모비를 봉안했다.(사진=윤한주 기자)

단군전을 만들기까지

삼청리의 옛 지명은 묵동마을이다. 이곳에 살았던 원용선은 광복이 되던 1945년 어래산 중턱에 조선독립기념비를 세우고 1948년 5월 5일 조선개국단군성모비를 봉안했다. 매년 10월 3일 개천절을 맞아 유림들과 함께 단군제를 봉행했다.

곽 전 회장은 “단군왕검의 홍익인간은 거룩한 건국이념이며 경천숭조사상을 길러 배달민족의 번영과 민족정기를 배양하는 구심점”이라며 “(유학자께서) 빈번한 전란을 잠재우고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단군전(삼청리 산24-1)은 유림들이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1961년에 옮겨왔다.

원 선생이 1968년 작고하자 장남 원정희(元貞熙)가 계승했다. 그러나 매년 행사를 치르는 데 경비조달의 어려움이 많았다. 원 씨는 1983년 단군전 부지를 유도회에 희사(喜捨)했다. 소유와 관리권을 유도회가 맡게 된 것이다.

당시 황성섭 주덕면장과 최상복 이장이 앞장서 취지문을 제작해 주민을 설득했다. 단군전 수호를 위해 삼청리 5개 마을과 신양3구 마을 유지 등 50여 명이 발기모임을 갖고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회장에는 이원영씨, 부회장은 황 면장, 김병삼이 선임됐다. 이종근 의원, 충주시장, 중원군수, 교육장, 경찰서장 등이 고문으로 위촉됐다.

마을 주민들도 똘똘 뭉쳤다. 매년 단군전 행사에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손님 접대하며 마을의 대행사로 해왔다는 것이 곽 전 회장의 말이다.

유도회는 단군전 확장의 필요성을 도청과 시청에 수차례 건의했다. 1994년 12월 8천만 원의 도비를 받아 단군전의 본전 숭령전(崇靈殿)이 32.63㎡의 목조 한옥으로 완공했다. 1995년 시비 3천만 원 보조로 재실 17.28㎡ 의 목조와가로 완공해 부지와 건물을 충주시소유로 관리 전환했다.

1998년 시비 1,700만원 보조받아 담장, 배수로, 계단, 3문, 홍살문 등을 완공했다.

작은 암자에 불과한 단군전이 이렇게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은 주덕지회와 마을주민이 수십 년 동안 들인 정성이었다.

곽 전 회장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단군전을 수호 관리했다는 것이 보람”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 단군전을 창설한 사람은 유학자 원용선이다. 그러나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단군전을 확장한 사람들이 있다. 성균관유도회 주덕지회와 마을주민들이다. 단군전의 본전인 숭령전(崇靈殿)은 1994년 12월 8천만원의 도비를 받아 32.63㎡의 목조 한옥으로 완공했다.(사진=윤한주 기자)

단군전에 관한 잘못된 정보가 많다, 왜?

현장을 둘러보고 사진을 촬영하니, 인터넷에 잘못된 정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후 대전)>을 제작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누리집(www.grandculture.net)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지역 중에는 디지털충주문화대전이 있다. 이 대전은 단군전에 대해 “1946년 원용덕(元容德)이 어래산에 자비로 창건한 후 1952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건축한 사당”이라고 대전은 소개하고 있다.

대전의 기록은 3가지가 잘못됐다. 창설연도가 1946년이 아니라 1945년이다. 이전 시기는 1952년이 아니라 1961년이다. 가장 큰 잘못은 창설자 이름이다. 원용선을 원용덕으로 표기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자료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인용한 주덕읍지(2007)가 그렇다. 현장을 한 번이라도 다녀왔다면 잘못된 정보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