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4년 당시는 청나라의 패권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 질서를 뒤흔든 세력은 세계 패권국가인 영국으로 그들은 배를 타고 온 해양 세력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방면으로는 러시아 세력이 진출하고 있었기에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 질서는 남쪽의 해양 세력과 북쪽의 러시아 세력 양쪽으로부터 도전을 받았고 그 틈을 타고 일본이 청나라의 패권 질서에 도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고종은 러시아를 세계 패권국가로 오판을 해서 청나라와 협력해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고종이 세계 패권국가는 영국이고 그 패권국가와 연결된 국가가 미국·일본 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영국·미국·일본을 중심으로 외교 대책을 입안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영국을 배제한 외교 대책을 채택했고 그것은 영국 대신 청나라를 중심에 두는 외교정책을 수립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에서 세계 패권국가인 영국을 배제한 외교정책은 비현실적인 외교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의 또 하나의 오판은 아관파천이었습니다. 고종은 청일전쟁에서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하자 몹시 놀랐습니다. 청나라는 동북아 패권국가는커녕 일본보다도 약한 국가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요동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여기에 부담을 느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고종은 세계 패권국가가 러시아라고 확신하고 러시아의 패권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판단해서 1895년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장악한 경복궁을 탈출해 어가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것은 의도와는 달리 영국의 패권 질서에 도전한 꼴이 됐습니다. 그 결과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러시아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에 패했습니다. 러시아의 패배와 더불어 조선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결국 고종의 19세기말 국제질서에 대한 무지와 오판이 국가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120년 전 구한말 시기에 국제정세를 잘못 판단한 오류를 교훈 삼아 지금의 국제정세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91년에 이르는 거의 45년 동안 미국과 소련의 패권전쟁이 있었습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 된 미국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 회원으로 받아들여 자유주의 무역 질서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화의 물결을 타게 된 중국은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환경규제에 느슨한 정책 등으로 세계 각국의 제조업체가 앞다투어 중국에 공장을 세워서 중국은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미국은 중국을 자유주의 무역 질서에 편입시키면 중국도 언젠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일원이 되어 일당 독재를 포기하고 자유주의 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 달리 중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보편적 가치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면서 일당 독재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일취월장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도 급속히 키우면서 종합국력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21세기 사회주의 초강대국 실현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오판한 결과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지금의 중국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놓고 미국과 패권전쟁을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2018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은 2022년 지금 그 깊이와 폭이 훨씬 넓어져서 단순한 무역전쟁이 아니라 문명의 충돌 혹은 가치 전쟁의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2022년 5월 23일에 출범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는 미중 패권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IPEF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동맹, 파트너 국가를 규합해 추진하는 일종의 경제협의체로 대(對)중국 압박 정책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안미경중(安美經中), 즉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손잡고 세계화를 추진할 때에는 이런 전략에 문제가 없었으나 미국과 중국이 패권전쟁에 돌입하고 어느 한쪽에 줄서기를 강요하는 상황에서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을 외치며 중재자 혹은 균형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120년 전 구한말의 역사에 비춰볼 때 우리나라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세계 패권 질서에 대한 냉정한 전망과 대한민국 국익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2020년 기준 미국의 GDP는 20.94조 달러로 미국의 GDP가 전 세계 GDP 중에서 약 24%를 차지하고 2020년 중국의 GDP는 14.72조 달러로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 중에서 약 17%를 차지합니다. 2022년 미국 국방비는 7,780억 달러이고 2022년 중국 국방비는 2,520억 달러입니다. GDP는 미국이 중국보다 1.5배 많고 국방비는 미국이 중국보다 3배가 많습니다.

중국은 지난 30년간 급속한 경제 성장을 했으나 2010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고도성장이 멈추면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고도성장이 지속되지 못할 경우 나타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혼란 가능성입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국가이지만 고도 경제 성장을 통해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야기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고도성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은 정치적인 통제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경제 발전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힘'이 아니라 '시장의 힘'에 달려있습니다.

중국이 2030년 혹은 2040년에 미국의 경제력을 앞서려면 지난 30년과 같이 고도성장을 계속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손잡고 있을 때에는 고도성장이 가능했지만 지금 미국과 중국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중국이 고도성장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중국 경제의 고도성장이 멈추는 날, 공산주의 독재 정치 체제는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럴 경우 중국은 초강대국이 될 가능성은 고사하고, 지금과 같이 통합된 국가를 유지하기도 어렵게 될 지 모릅니다.

한국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참여 함으로써 한국도 미·중 패권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IPEF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첫 단추는 잘 끼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이 분열하지 않고 한마음이 되는 국민통합이 되어야 합니다. 국민통합으로 미·중 패권전쟁의 소용돌이를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