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독립문을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으로 오해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바로 뒤에 서대문형무소의 옛 자리가 있어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문’은 중국의 칙사가 무악재를 넘어서 조선에 당도하면 조선의 왕이 직접 나가 그를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즉 ‘중국을 사모하는 건물’을 허문 자리에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 지은 건축물입니다. 만일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문이었다면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을 일제가 그대로 두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독립문은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줬음을 상기시켜주는 상징물이었기에 일제가 그대로 두었을 뿐입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이긴 후 1895년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합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우는 계획을 제시해서 독립문이 건립 되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문구가 왜 쓰여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면 188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최초의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조선을 청의 ‘속방(屬邦)’으로 명기해서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를 분명히 한 조약을 체결하였기에 청나라와 분리시키는 의도로 시모노세키 조약에 자주독립국 문구가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1905년 을사늑약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으로 이미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청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청과 조선과의 관계가 전통적 조공관계로 공물을 바치고 의례적인 행사 몇 가지만 하면 되었으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면서 청은 조선을 근대적 식민지배를 하려는 속셈을 명문화하게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1882년에 청의 식민지로 되었다가 1885년에 일본에 의해 독립국으로 되고 1905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1882년에 우리에게 굴욕적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게 되었는지 살펴보면 1882년 7월 19일에 임오군란이 발생합니다. 임오군란은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군대의 차별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으로 구식군대와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당파)의 지원을 받은 대원군이 복귀합니다. 그러나 고종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파병되어 임오군란을 제압하고 대원군을 청나라 텐진으로 압송을 합니다. 그리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됩니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갑신정변(1884년), 동학 농민 운동(1894년), 청일전쟁(1894년), 갑오개혁(1894년), 을미사변(1895년), 아관파천(1896년), 러일전쟁(1904년), 을사늑약(1905년), 경술국치(1910년)로 이어져서 조선왕조가 멸망을 하게 되는 시작점이 임오군란입니다.

고종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개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1881년에 60명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으로 파견하는 등 개화 추진에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882년에 임오군란이 발생하면서 개화의 불씨는 꺼지게 되고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임오군란 사건 초기에 구식군대의 봉급문제로 생긴 불만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거나 구식군대의 구심점이 되기 쉬운 대원군을 비롯한 위정척사파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시도를 했으면 사건이 크게 번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고종이 추진하던 개화가 성공을 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임오군란은 표면적으로는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개항과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와 개항과 외국과의 통상을 찬성하는 개화파(開化派)의 충돌입니다. 구한말에는 국운이 쇠퇴하는 시기였기에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분열과 충돌을 내부적으로 해결을 못하고 외세가 개입되어 나라가 망국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국외 이주에 대해서 동서독 국경 혹은 동서 베를린의 모든 검문소를 사용할 수 있다.”는 동독의 기자회견이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즉시 철거한다고 잘못 알아들은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암살사건이 1차세계대전을 촉발했고 기자의 오보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임오군란으로 조선이 패망하게 된 것 모두가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어 큰 사건이 된 사례입니다.

지금 우리도 좌파, 우파, 진보, 보수로 나뉘어서 분열과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정권은 보수정권으로 바뀌었으나 국회는 진보세력이 우세해서 사사건건 충돌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익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당파와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풍조로 나라가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이므로 대통령을 중심으로 구심력을 발휘해야 나라가 안정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국익을 위한 길일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우크라아나 전쟁, 미중패권 전쟁 등으로 외부환경이 어려울수록 내부는 단결과 화합의 정치를 해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합을 해서 국력이 상승하고 있을 때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어 통일을 이룰수도 있고 그 반대로 우리가 내부 분열로 인해 국력이 하락하고 있을 때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구한말 임오군란 시기와 같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