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역사, 앞으로 살아갈 나의 역사, 그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도 나고 그 역사의 주인공도 나다. 그러기에 내게 부끄럽지 않는 역사를 창조하고 싶다.

여기서 역사성 또는 역사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또 역사적 가치와 의미는 어떻게 매겨지고 부여될까? 사실 알려진 역사보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더 많다. 다시 말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이야기만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도 역사가 될 수 있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교과서 속 세상보다 교과서 밖의 세상이 더 넓고 더 크다. 교과서 안에 갇힌 꿈이 아닌 교과서 밖의 큰 꿈을 가지는 것이 역사 앞에서 역사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나만의 세상, 나만의 꿈

하지만 더 큰 나를 위한 꿈이 위대하다. 홍익인간의 진정한 의미는 모두가 하나라는 것에 있으며, 나로 출발해서 의식의 확장에 따라 민족, 국가, 인류까지 확장이 가능하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꿈, 그것은 나 안의 또 다른 큰 나의 꿈이다.

우리는 세상사적 가치, 즉 만들어진 가치와 지배계층의 관념적 논리에 휘둘리지 말아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소중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창조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면 된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그 자체로도 온전하며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고 또 누군가의 엄마고 아빠가 아닌 가. 역사는 시간과 공간, 즉 씨줄과 날줄이 엮어져 만들어 진다. 직조의 기술자, 즉 베틀을 움직이는 사람이 곧 창조자이다.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인간의 가치, 그것이 반영되면 역사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행위가 역사적인 행위이며 인간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곧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K-POP 한류 열풍과 함께 홍익정신은 K-Spirit으로 진화하고 있다.

사람도 생명체, 곧 지구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임에는 틀림없다. 인류사적 관점인 뇌와 인간의 발달사를 통해서 본 인간의 가치는 홍익에 있다. K-POP 한류 열풍과 함께 홍익정신은 K-Spirit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위대한 가치인 지상 최대의 평화철학으로 세운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고, 한국인이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된다.

즉 큰 나를 위해 살아야 된다. 21세기 홍익의 가치와 의미, 그것은 결국 하나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로 돌아간다는 진리에 있다. 결국 그 진리는 모두가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한민족의 깨달음의 경전, ‘천부경’의 원리와 부합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빛나는 얼과 위대한 정신은 국학을 만났을 때 발현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른 시기에 국학을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 국학은 민족의 정수이자 핵심정신이며 고유한 사유체계이다. 이러한 국학은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집단, 즉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내가 누군지 알아야 역할과 사명도 알게 되는 것이고, 인생의 목적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민족주의를 제안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셨던 분이 바로 독립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민족혼이 깃들었다는 가곡 ‘선구자’의 가사이다. 그런데 노래뿐만 아니라 가사 속에 등장하는 일송정과 해란강은 실존한다. 용정은 19세기 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이 개척한 땅이며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일송정은 본래 비암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였는데 그 모양이 정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일송정은 용정팔경 중 하나이다. 1938년 일제에 의해 고사되었고, 1991년 3월 소나무를 다시 심었으며, 그 해 9월에 정자를 건립하였다. 지금은 소나무와 정자를 합쳐서 일송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작사자와 작곡가가 친일 인물 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족의 노래로 불려 왔던 가곡마저도 친일 프레임으로 갇혀 있다.

가곡 ‘선구자’는 윤해영이 ‘용정의 노래’라는 시를 조두남에게 주고 작곡을 부탁했으나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에 노래 제목과 가사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윤해영과 조두남의 친일 행적으로 인하여 논란이 생기면서 가곡 선구자가 친일 노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작사자와 작곡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가사를 다시 고치고 의미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민족정신이 깃든 노래로 불려왔다.

지금도 ‘선구자’를 부를 때면 숙연해지고 경건해 진다. 각자 마음속에 선구자 한 명 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가슴에 품은 마음 속 선구자를 생각하며 노래를 부른 다면 다시 한 번 민족의 노래로 승화될 것이다. 작사자와 작곡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노래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칫 우리 스스로 친일 프레임에 갇혀 가곡 ‘선구자’를 외면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피해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책 한 권이 눈길을 끈다. 백포 서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길영 박사의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이 그것이다. 실질적인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 역할을 했던 서일, 그는 왜 광복이후 잊혀 졌을까?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라는 그의 존재감이 역으로 대일항쟁기와 광복이후 여전히 친일 부역행위가 청산되지 않았고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주의 사관이 지배해 온 대한민국의 역사가 ‘서일’ 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리게 한 것은 아닐까.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의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군의 영웅이라면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최근 영화로 상영되기도 한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백포 서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삼일항쟁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올해에 백포 서일 총재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다.

역사의 선구자는 누구인가?

한때 선구자가 누구인가로 논란이 있었다. 선구자는 앞서가는 자를 말한다. 역사에서는 앞서가는 자가 있으며 뒤 따라 가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대일항쟁기, 당시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항일무장투쟁의 구심이 되었다가 기꺼이 별이 되신 분이 바로 선구자의 삶을 살았던 백포 서일이다. 그런데 역사의 선구자는 국조 단군왕검이 될 수도 있고, 삼일항쟁에서 만세를 불렀던 수많은 민중이 될 수도 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주석이 될 수도 있다.

대일항쟁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의 한민족주의

눈 내린 산길을 처음 걷는 선구자,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뒤 따라 가는 자들이 점차 많아질 때 우리는 모두 눈 덮인 산길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백포 서일은 누구인가?

백포 서일은 이천 서씨로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일항쟁 운동가이자 종교인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기관의 총사령관이자 총재이었다.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끌어 청산리 대첩이라는 대일전쟁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런 분이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장군 등에 가려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네 분의 뛰어난 장군들을 거느리고 대일전쟁의 지휘관이었고 대일항쟁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종교인으로서 대종교의 철학ㆍ사상 기반을 만들었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역사에 눈을 떠 ‘대한민국’의 ‘한’의 의미를 정립하기도 하였다. 백포 서일은 ‘한’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았고, 단군의 역사가 곧 ‘한’의 역사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서일은 삼일항쟁을 겪으면서 비폭력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고 오로지 무력만이 자주 독립이 가능하다고 판단, 군대를 설립하고 뛰어난 군인 양성을 위하여 사관양성소도 설립한 것이다.

백포 서일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일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단체를 이끌다가 북로군정서, 대한군정서 등의 수장을 거친 뒤 통합 독립군인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를 맡았다.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자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한 뒤 대종교 최고 수련 경지였던 폐식호흡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권력만 가지면 책임지지 않는 이 시대 정치권과 사회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백포 서일은 역사는 안보이며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했다. 그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단군사상을 연구했다. 그 정신은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 전투 등 대일항쟁으로 이어졌다.

서일은 ‘왜 우리가 일본에게 압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나?’ 라고 질문했을 때 가장 큰 이유가 사대주의였다고 본 것이다. 사대주의를 벗어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했고, 그래서 그는 고조선 역사를 강조했다. 그리고 홍익인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는 21세기 리더 국가로서 한민족주의를 제안했다. 근대 최대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군조선을 근간으로 하는 한민족주의였다. 백포 서일은 한민족주의의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겼다.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그 길을 열었던 지도자였다. 이제 한국은 세계로 나가야 할 때이다. 그럴 때 한국 고유의 사상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상생이라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로 세계화를 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고 본다. 이 상생의 이념을 확립한 분이 바로 서일이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창이어야 한다. 또 역사는 낮에는 길 잃은 자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고, 밤에는 길 잃은 배의 등대가 되어 주어야 한다. 암울했던 시대,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주었던 대일항쟁의 역사,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일송정이 되고 선구자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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