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물으면 한참을 생각해도 잘 안 떠오른다. 평생을 수행하고 기도하며 살았다. 인생에서 세 번 죽을 고비를 만났는데, 첫 번째 죽을 고비에 불가와 인연을 맺었고, 두 번째와 연이은 세 번째 죽을 고비에 뇌교육명상을 만났다. 경북 청송군에 있는 사찰 주지 혜선 스님. 맑고 깊은 눈빛과 고운 목소리를 가진 혜선 스님에게서 넉넉한 사랑의 마음이 느껴진다. 평생 법당에서 기도하던 스님이 요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쁘게 움직인다. 혜선 스님에게서 새로운 홍익行의 삶을 들어보았다.

혜선 스님은 여섯 살 때 세 살 위 오빠의 죽음을 본 후로 생사에 관한 고민에 빠져 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하여 지금은 청송 학운사 주지스님으로 수행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혜선 스님은 여섯 살 때 세 살 위 오빠의 죽음을 본 후로 생사에 관한 고민에 빠져 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하여 지금은 청송 학운사 주지스님으로 수행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혜선 스님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어머니는 불심이 깊으셔서 매일 해인사에 불공을 드리려 다니셨다. 할아버지가 스님이셔서 불교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었다. 어릴 때 스님은 가수가 되고 싶었다. 이미자 씨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던 스님은 서울 가서 가수가 되겠다고 아버지를 졸랐지만 호된 꾸지람만 들었다.

“친구들이 언제 어디서 노래자랑대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줬어요. 당시 가야면과 인근 야로면에서는 노래자랑대회가 자주 열렸어요. 저는 부모님 몰래 대회에 나가서 상을 휩쓸었어요. 한번은 상으로 제 몸집만 한 양은 대야를 받아서 들고 오는데, 길에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대야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많았던 스님은 어머니 등에 업혀서 병원으로, 약국으로 다녔다. 어머니는 늘 딸을 걱정해서 자라서도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또 그런 동생을 세 살 터울의 오빠는 끔찍이도 예뻐했다. 밖에 나갈 때마다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챙겼다. 그런데 맏이였던 그 오빠가 아홉 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죽은 오빠를 멍석에 말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섯 살의 어린 스님은 그 뒤를 한참 따라갔다고 한다.

오빠의 죽음은 스님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말 못 할 고민을 안겨주었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하는지, 왜 같이 살지 못하고 저렇게 죽어야 하는지’ 그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어요. 그때부터 생사에 대한 고민에 빠져서 살았던 것 같아요.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면 절에 갔어요.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화가 나도 절에 갔어요. 절에 가서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그냥 편안해지더라고요.”

초중고등학교를 남녀공학을 다녔다. 학창시절에는 리더십도 발휘하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냈지만,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남자친구나 연애에 관심은 없었다. 친구들의 꿈은 현모양처였지만, 스님은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으면서 타지에서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이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 길로 청도 운문사를 찾아갔어요. 정말 어렵게 갔어요.”

참선과 절 수행을 오랫동안 한 혜선 스님은 퇴행성 관절염 진단을 받았고, 하지정맥류로 시술을 열 군데 넘게 받아야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참선과 절 수행을 오랫동안 한 혜선 스님은 퇴행성 관절염 진단을 받았고, 하지정맥류로 시술을 열 군데 넘게 받아야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운문사를 찾아간 그에게 어른 스님은 부모님 허락을 받고 왔냐고 물었다. 그 어른 스님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 겁에 질려 그냥 ‘예’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려던 것이 아닌데, 절에 있고 싶어서 거짓말을 해 버린 것이다. 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부모님이 1년이 채 안 되어서 운문사로 찾아왔다. 그 어른 스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크게 꾸중 듣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절에 있고 싶다고 애원해도 어른 스님과 부모님은 받아 주지 않았다. 스님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단다.

집으로 돌아온 후로도 기회만 있으면 절에 다녔다.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밖에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 스님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달에 한 번 병원에 실려 가다, 일주일에 한두 번, 급기야 하루에 몇 번씩 병원에 가야 했다. 이때가 스님이 말한 첫 번째 죽을 고비였다. 스님이 다니던 병원 원장이 35년 동안 의사를 하면서 이런 환자는 처음 봤다며, 가망이 없으니까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이나 해 먹이라고 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너무 슬펐다. 그제야 부모님은 주위 사람이 소개해 주는 절로 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의탁한 절은 여느 불교 사찰과는 달랐다. 선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 선사는 무속인의 존경을 받아 무속인이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곳에서 수행하면서 깊은 내면의 체험을 하고,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병이 나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라면 하나 끓여보지 않았던 그가 공양간의 소임을 맡아 하자니, 선배 스님들로부터 받은 타박과 설움을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늦게 들어온 행자가 수행의 진도가 빨라 선사의 관심을 받으니, 선배 스님들의 타박은 더 심해졌다. 그럴수록 스님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별을 끊어내기 위해 더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하고 수행했다.

하지만 불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스님은 때가 되면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방장이 되어 절의 살림살이를 맡게 되었을 때, 우연히 불교용품을 파는 상점에서 불교대학에 관한 책자를 보았다. 상점 주인에게 불교대학 입학에 관해 물었고, 스님 한 분을 소개받아서 승가대학에 입학했다. 선사도 모르게 입학해서 1년을 혼자 공부하다가, 2학년 때 들켰다. 선사는 알음알이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스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그냥 두었다고 한다.

스님은 승가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그 절을 떠나게 되었다. 부산에 있는 유명한 무속인이 산속에 절을 짓고, 스님을 주지로 모시고 가겠다고 선사에게 청했다고 한다. 스님은 당시 ‘무소유’라는 개념이 강했던 터라 절의 주지가 되기가 싫었고, 무속의 세계와 더는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스님의 마음을 알고, 선사는 스님에게 세상에 제도할 중생이 많으니 그만 하산하라고 했다. 그 길로 절을 떠나 스님은 십여 년간 이어진 만행을 시작했다.

혜선 스님이 단월드 안동센터에서 뇌교육 명상을 하고 있다. 단월드 뇌교육명상으로 건강을 회복해 스님은 천일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회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혜선 스님이 뇌교육 명상을 하고 있다. 뇌교육명상으로 건강을 회복해 스님은 천일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회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스님은 만행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무소유로 살면서, 스승님으로 모실 큰 스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찾아간 사찰에서 노스님 한 분을 만났다. 노스님은 스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하지만 상좌스님은 예약하지 않았다고 따뜻한 방을 내어주지 않고, 법당에서 밤을 보내라고 했다.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 밤에 난방도 안 되는 법당에서 방석을 여러 겹 깔고 앉아 참선했다. 손발이 시리고 아프기까지 했지만 참아가며 참선을 하던 중에 삼매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스님은 갑자기 청천벽력같은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바깥을 찾아다니느냐. 네 안을 바라봐라.” 스님은 ‘바로 이거다’ 싶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얼마나 세었는지 그 멍이 한 달을 갔다. 그 길로 만행을 그만두고, 노스님의 절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곳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상좌스님에게서 질투의 에너지가 느껴졌고, 스님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노스님께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노스님은 출가한 사람이 어머니가 아프다고 집에 가느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도 병원에 계신데 한 번도 뵙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얼른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왜 노스님 곁을 떠나려고 하는지 끝내 말씀 못 드렸어요. 노스님께 하직인사로 삼배를 올리는데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요.”

스님은 노스님을 떠나 그 길로 금강사 주지로 임명받아서 12년간 있었다. 그런데 오랜 참선과 절 수행은 스님의 몸에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퇴행성 관절염 진단을 받았고, 하지정맥류로 시술을 열 군데 넘게 받아야 했다. 절을 하기도 힘들었고 가부좌로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큰 절의 주지로 있을 수가 없어서 금강사에서 나와서 합천 해인사 밑에 있는 토굴에서 2년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스님의 제안으로 2년간 주지가 비어있던 청송의 절로 오게 되었다. 절이 규모가 작고 신도가 많지 않아서 불편한 몸을 관리하면서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토굴을 정리하고 청송으로 왔다.

혜선 스님이 머리끝 백회에 집중하며 BHP명상을 하고 있다. BHP명상 효과를 직접 체험한 스님은 관공서나 복지관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날마다 BHP명상을 알린다. [사진=김경아 기자]
혜선 스님이 머리끝 백회에 집중하며 BHP명상을 하고 있다. BHP명상 효과를 직접 체험한 스님은 관공서나 복지관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날마다 BHP명상을 알린다. [사진=김경아 기자]

몇 년 동안 6명의 주지가 왔다 가고, 그마저도 2년간 비어있던 절을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합천 토굴을 정리하면서 가져갔던 돈으로는 6개월을 버티기 어려웠다. 마침내 전기까지 끊어졌다. 이 절에 와서 혼자 백일기도를 했던 스님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신도들과 함께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를 제대로 막을 수 없는 법당에서 기도하던 스님은 2016년 여름에 더위를 먹고 쓰러졌다. 스님의 두 번째 죽을 고비였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좀 회복되나 싶었는데, 2017년 80년 만에 찾아온 폭염에 스님은 다시 쓰러졌다. 고열에 시달리며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밤에 자다가도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이 잦았다.

스님은 응급실에서 통곡했다. “몸이 무너지니까 몸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수행한 것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오고. 잡념이 몰려오는 겁니다. 내 평생 수행한 것이 다 무너져 버렸다는 걸 알았어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이 귀로 들어가니까 간호사가 솜으로 귀를 막아 주었어요.”

그 와중에도 천일기도는 마치고, 이 절을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을 못 올라가서 방에서 기도하던 스님은 그 날은 기어서라도 올라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신도가 해 온 죽을 뜨는 둥 마는 둥하고, 대웅전에 올라 삼배를 올리고 부처님을 바라본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고 한다.

“저는 평소에 신도들에게도 비는 기도를 법당에서 하지 말라고 해요. 부처님은 신이 아니니까 빌지 말라고요. 연세 드신 신도들은 처음에는 화를 냈어요. 빌라고 절에 오지, 그럼 왜 오느냐고. 지금은 우리 신도들은 빌지 않아요. 근데 그날 저는 처음으로 빌었어요. ‘다시 한 번 수행할 힘과 용기를 달라고’, 정말 벼랑 끝에 서 있었으니까 너무 간절했어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방석이 다 젖어 있었어요.”

스님은 그때의 절박했던 심경에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삼배를 올리고 대웅전을 나오는데 갑자기 근처 절에 계신 스님이 떠올랐어요. 그 스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반가워하셨어요. 스님을 만나러 가는데 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1시간처럼 느껴졌어요. 그만큼 운전하기도 힘들었어요. 바깥으로 많이 다니시는 스님이라 몇 달 만에 뵈었어요.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스님께 더 깊이 묻지 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안동에 있는 요가센터를 다니신다고 여기서 묵고 내일 함께 가자고 하셨어요.”

혜선 스님은 인생에서 닥친 세 번째 죽을 고비에서 단월드를 만났고, 평생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혜선 스님은 인생에서 닥친 세 번째 죽을 고비에서 단월드를 만났고, 평생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다음 날 도반 스님과 함께 안동에 있는 요가센터에 간 스님은 단번에 요가의 어려운 동작들을 따라 할 수도 없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도반 스님과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청송의 절로 돌아가기로 했다. 식사를 하던 중에 도반 스님이 ‘명상하고 기체조 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는 어떠냐’라고 했다. 무언가 느낌이 좋아서 칼국수 먹고 함께 가보자고 했다.

“도반 스님과 뇌교육명상을 하는 안동센터에 갔어요. 원장님이 기운 없이 들어오는 저를 보시고, 그냥 누우라고 하셨어요. 도반 스님과 저는 원장님과 사범님에게 각각 몸을 맡기고 활공을 받았어요. 몸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거예요. 너무 신기할 정도로. 일어났더니 천근만근 같았던 몸이 너무 가벼웠어요. 그날이 2017년 11월 7일입니다. 잊을 수가 없는 날이에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센터에 나와서 수련을 했습니다.”

스님은 수련을 시작하고 5일 뒤에  평생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나이가 계속 드니까 지금 이 상태로 가면 또 몸이 무너질 것 같았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시작이 반이니까. 지금부터라도 몸을 단련해 놓자고 결심했어요.”

스님은 인생에서 닥친 세 번째 죽을 고비에서 뇌교육명상을 만났고, 평생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말 적극적으로 뇌교육명상을 했습니다. 매일하는 수련도 그랬고요. 심성교육도, PBM(파워브레인메소드) 교육도 제가 먼저 가고 싶다고 원장님께 이야기 했어요.”

늘 절에만 계시던 스님이 바깥출입이 잦아지자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았지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뇌교육명상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기에, 스님은 천일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회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센터에서 수련을 마치고, 청송에 있는 절로 돌아갈 때면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는 신도들에게 차 문을 열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신도들도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던 주지스님이 건강을 되찾고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혜선 스님이 팔굽혀 펴기로 체력단련을 하고 있다. 스님은 몸이 무너지니 몸에 집착이 생기고 수행한 것이 다 무너지더라고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혜선 스님이 팔굽혀 펴기로 체력단련을 하고 있다. 스님은 몸이 무너지니 몸에 집착이 생기고 수행한 것이 다 무너지더라고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스님은 심성교육을 가서 자신의 영혼을 만났다.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을 때 수행을 통해서 만났던 자신의 영혼과 신성을 그동안 너무 오래 잊고 살아온 것에 대해 미안함의 눈물을 흘렸고, 참나를 다시 만난 재회의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PBM교육을 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상을 하나씩 지우면서 무아를 체험했다. 스님은 무아를 체험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잃어버린 것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했다.

“제가 심성교육과 PBM교육을 받으면서 느낀 것은 이건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받아야 하는 거라는 걸 느꼈어요. 신도들도 뇌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정보가 바뀌지 않으면 의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뇌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 순간부터 뇌교육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의식성장과 변화에 대한 열정으로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뇌교육의 고급과정을 받으면서 자신을 내려놓는 공부들이 더 깊어졌어요. 그때까지 제 마음속에 조금 남아 있는 게 있었어요. 스님이라는 신분으로, 승복을 입고 길거리로 나가서 러브핸즈를 하는데 사람들의 의아한 눈빛이 느껴져요. 그때 마음에서 걸림이 딱 올라오죠.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직 남아 있었고요. 근데 마스터힐러 교육 3차 과정에서 완전히 다 깨졌어요. 대성통곡을 했어요. 정말 대자유를 얻었습니다.”

혜선 스님의 간절함은 그렇게 답을 얻었다. 스님은 요즘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단다. “오전에 센터에 수련하러 오거나, 법회가 있는 날은 저녁에 옵니다. 그리고 낮에 관공서나 복지관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BHP명상을 전해요. BHP명상은 정말 보물이에요. 뇌교육을 알리기가 너무 쉬워요. 그냥 손만 잡고 하면 되거든요. 러브핸즈할 때 어깨를 잘 내주지 않으려는 분들이 있었는데, 손을 잡고 BHP명상을 알려주고 눈을 쳐다보면, 그렇게들 편안하고 좋아하세요. 스님 눈빛이 따뜻하고 깊다고.”

스님은 신나게 홍익행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번은 목욕을 가서 탕 안에서 한 분에게 BHP명상을 알려 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도, 나도’ 하면서 오고, 또 아는 사람들을 부르고 해서, 탕 안에서 30분간을 BHP명상을 알려주었어요. 탕에서 나와 열이 나서 찬물로 얼마나 머리를 샤워했는지 몰라요. 열을 식히느라고.”

스님은 천안에 있는 국학원까지 교육을 받으러 다니면서, 우리 민족의 바른 정신과 문화를 국민에게 알리고 실천하는 국학원에 감명을 받았다. 스님은 홍익정신을 바탕으로 인간사랑, 나라사랑, 지구사랑의 정신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여 한민족의 새로운 탄생과 지구경영의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국학원의 설립 취지에 감동받았고, 국학원이 있어서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스님은 120세 인생을 선택하고, 이제까지 살아온 전반기 생을 성찰하고, 앞으로 남은 60년의 후반기 생을 계획하고 있다. 청송에 봄이 오면, 신도들에게도 건강과 행복에 좋은 선물을 줄 거라고 이야기하는 스님의 얼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스님은 우리 민요 ‘아리랑’의 의미인 ‘참나를 깨닫는 즐거움’을 홍익행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스님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샘물, 자비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