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국학기공협회장, 충북국학운동시민연합 대표, 충북 청주시 옥산면 체육회장 등등…. 그 외에도 송용해 씨(60세)가 맡은 사회적 직책은 많았다. 그는 반도체 회사의 부사장으로 일하면서도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능력보다는 타고난 부지런한 성격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잘 살고 가족을 책임지는 것만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송 회장은 40대 중반에 국학기공과 뇌교육명상을 만나면서부터 ‘홍익’을 추구하는 삶으로 변했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살며 60세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인생 설계를 들어보았다.

송용해 충북국학기공협회장. 반도체 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며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송용해 충북국학기공협회장. 반도체 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며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커서는 엔지니어여서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지방을 다니면서 일했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이동하며 사는 것이 제 체질인 것 같습니다.” 송 회장의 아버지는 삼팔선 넘어 강원도가 고향이신데 월남하셨고, 어머니도 삼팔선 경계에 고향이 있어 내려왔단다. 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때 남쪽에 있던 동생은 극적으로 만났지만, 북쪽에 있는 형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 금강산을 가보고 싶어 하셨지만 아버님은 형님도, 금강산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부모님이 가게와 농사를 겸해서 생활은 풍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서 송 회장은 내성적인 아이로 자랐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손으로 만지고 만들고 고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지금 엔지니어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어려서 뚜렷한 꿈이 없었어요. 양구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춘천에서 기능대학을 다녔어요. 그리고 인천에 가서도 기술 배우고, 부산으로 내려가 오래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사는 부모님을 보고 배워서, 내성적이긴 했지만 가만히 있는 체질은 아니어서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직장에 다닐 때 아내 임정명 씨(55세)를 만났다. 당시 탁구가 유행이었는데, 친구와 함께 남녀로 짝지어 탁구를 하다가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해서 1남 1녀를 낳고 키웠다. 딸은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고, 아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청주에서는 23년 전부터 살았다. 중간에 부산에 다시 가서 사업도 했지만, 지금 사는 옥산면이 마지막 정착지가 되었다.

송용해 충북국학기공협회장과 아내 임정명 지구시민운동연합 충북지부 대표. 부부는 함께 홍익활동을 하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동지이다. [사진=김경아 기자]
송용해 충북국학기공협회장과 아내 임정명 지구시민운동연합 충북지부 대표. 부부는 함께 홍익활동을 하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동지이다. [사진=김경아 기자]

2003년쯤이었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건강도 안 좋아지고, 아내와도 서로 부딪힘이 잦았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길을 가다가 단월드 율량센터의 포스터를 봤다. 거기에 적힌 문구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행복’ 그 글자만 봐도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와 아내가 함께 뇌교육 명상수련을 함께 시작했다. 직장에 매인 그보다 아내는 센터에 더 자주 나가고 수련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아내가 좋은 수련이나 교육을 받고 권하면 그도 받곤 했다. 아내는 그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수련을 시작하고 얼마 후 심성교육을 받은 아내의 권유로 그도 심성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심성교육때 처음으로 저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남한테 싫은 소리도 못하고, 거절도 못 하고 살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많았고 저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아내와의 관계도 그게 제일 문제였어요. 그런 저 자신을 보면서 정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내 성격을 내가 바꾸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심성교육때 제 가슴에 꽂힌 한마디였습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한번 해 보자!’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계속 누군가의 밑에서만 일했던 그는 심성교육을 받고 1년 안에 창업하기로 비전을 세웠다. 창업은 그가 자신을 180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회사 이름을 ‘드림테크’라고 정했다. 함께 뇌교육명상을 해 온 아내가 큰 힘이 되었다. 회사를 조금씩 키우면서 조그마한 공장을 지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중국에 진출했다. 한국 공장은 임대로 주고, 3년 6개월을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귀국해서 다시 공장을 차리려고 하던 중에, 현재 다니는 회사로부터 부사장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와서 그 일을 해오고 있다.

중국에 있을 때도 그는 매일 뇌교육명상을 빠지지 않고 했다. 한국에서 마스터힐러 과정까지 마치고 간 후여서, 뇌교육명상은 그의 일상 습관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는 아내와 함께 홍익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의 아내 임정명 씨는 지구시민운동연합 충북지부 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홍익활동을 하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바쁠 때 서로 대신해 주기도 하면서 부부 사이는 더 알콩달콩해졌다. ‘진짜 좋아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부부 사이다. 부부가 함께 몸도, 마음도, 얼굴도 젊어지고 있단다. 그는 딸과 아들이 심성교육을 받고 홍익활동에 바쁜 부모님을 이해하고, 특별한 뒷바라지 없이도 대학을 졸업하고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며 대견해 했다.

송용해 회장은 아내 임정명 씨와 함께 뉴질랜드 명상여행에서
송용해 회장은 아내 임정명 씨와 함께 뉴질랜드 명상여행에서 "함께 120살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매 순간 홍익하자"는 약속을 했다. [사진=본인 제공]

그는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다녀온 뉴질랜드 명상여행을 떠올렸다. 맑고 푸른 뉴질랜드의 하늘과 산과 들, 바다를 보면서 그는 아내에게 “여기서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스빌리지를 걸으면서, 120세 계단에서 명상을 하면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인생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자연 속에서 절로 순수한 마음, 나와 모든 인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은 아직도 뉴질랜드의 자연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아내와 약속했단다. “함께 120살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매 순간 홍익하자”라고.

2015년에 그는 충북국학기공협회 회장이 되었다. 충북국학기공협회는 다른 광역시도 국학기공협회에 비해 활성화가 덜 되어있었다. 그는 국학기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했다. 먼저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국학기공 수련장을 개설했다. 그는 옥산 체육관에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시작하는 국학기공 교실을 열었다. 처음에 아내와 함께 두 명이 시작했는데, 한두 명씩 늘어나더니 지금은 스무 명 이상이 꾸준히 국학기공 수련을 하고, 대회에도 출전해서 모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올봄부터는 국학기공 수련장은 아내가 하고, 송 회장은 ‘배꼽힐링 교실’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부부의 홍익실천에 대해 옥산면에서 칭송이 자자하다. 그 덕분에 송 회장은 2017년부터 옥산면 생활체육회장까지 맡게 되었다고 한다.

송용해 회장은 충북국학기공협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다. 2018년 5월 개최된 생활체육대축전 국학기공대회에서 활약하는 충북 대표팀. [사진=김경아 기자]
송용해 회장은 충북국학기공협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다. 2018년 5월 개최된 생활체육대축전 국학기공대회에서 활약하는 충북 대표팀. [사진=김경아 기자]

그리고 그는 국학기공 시범단을 만들고 국학기공 전문강사 양성에 집중했다. 이후 충북국학기공협회가 전국 규모 대회와 국제대회에서 청소년부, 어르신부, 일반부에서 모두 수상을 하게 되면서 국학기공 강사들과 동호인들이 자신감이 커졌다. 올해에는 수상보다는 단합과 활성화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라고 한다. 그래서 올해 새 시범단을 양성하고, 선배 시범단들은 강사양성과 동호회 활성화에 더욱 집중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면서도, 송 회장은 자신이 너무 오래 회장직을 맡은 것 같고, 너무 많은 일에 걸쳐 있어서 제대로 못 하는 것 같다며, 후임자가 물색되면 언제라도 회장직은 내놓겠다고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홍익’이란 무엇인지를 물었다. “먼저 솔선수범하는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지시하기보다는 먼저 합니다. 회사에서도 청소할 게 보이면 제가 하고요. 국학기공협회에서도 일이 보이면 제가 나서서 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음은 실천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홍익하려는 마음을 갖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보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습니다.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를 볼 수 있고 홍익을 하면 제가 먼저 변화됩니다. 그 기쁨이 제겐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는 엔지니어여서 정년이 없단다. 하고 싶을때까지,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일을 할 수 있단다. 앞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면서 열심히 지역사회에 홍익을 실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60세 이전의 삶보다는 지금부터 펼쳐나갈 60세 이후의 삶이 더 기대된단다. “앞으로 내 삶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요. 행복은 자신이 찾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으면 행복한 건데요. 저는 행복을 찾고, 어떤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항상 깨어있고 최선을 다하고, 뇌교육명상을 통해서 체력과 심력, 뇌력을 단련하니까, 앞으로 더 건강하고 행복해져서 120살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

송용해 회장은 옥산체육관에 새벽공원 수련장을 개설해 국학기공 교실은 아내와 함께 지도했다. 앞으로 국학기공 교실 외에 배꼽힐링 교실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사진=본인제공]
송용해 회장은 옥산체육관에 새벽공원 수련장을 개설해 국학기공 교실은 아내와 함께 지도했다. 앞으로 국학기공 교실 외에 배꼽힐링 교실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사진=본인제공]

올해 4월에 충북 증평군에서 ‘전국생활체육대축전 국학기공대회’ 가 열릴 계획이다. 송 회장은 충북국학기공협회 회장으로서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리고 도민들에게 BHP명상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옥산면 국학기공 동호인과 배꼽힐링 동호인들을 모아 함께 국학원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 많은 일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옥산 체육관으로 간다. 5시 30분에 만나는 동호인들에게 항상 묻는다. “오늘 아침에는 뭐 하러 나오셨습니까?” 동호인들은 입을 맞춰 씩씩하게 답한다. “보약 먹으러 왔습니다.” 신나게 국학기공 체조를 한 동호인들은 마치기 전에 5분간 배꼽이 빠져라 웃는다. 5분! 짧은 시간이지만 웃기에 아주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 웃음으로 동호인들의 건강이 좋아지고, 얼굴이 환해지고, 인생이 달라졌다. 송 회장은 매일 조금씩 건강해지는 동호인들을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60대 청년’이라는 말이 송 회장을 보면 실감이 난다. 그는 60대의 열정적인 청년이고 동시에 삶의 연륜에서 나온 지혜와 인품을 갖춘 청년이다. ‘나 혼자, 내 가족이 잘 살면 된다’는 생각에서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바뀐 그의 인생!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그가 펼칠 홍익의 실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