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수령을 자랑하다
신시•고조선의 꽃에서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 강릉 사천면 방동리 무궁화 안내판과 입구(사진=윤한주 기자)
 
광복절을 앞둔 지난 11일 강릉을 찾았다. 이곳에 최고령 무궁화가 만개했기 때문이다. 강릉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만난 이한길 환동해학회 편집위원장(강원대학교 강사)의 차를 타고 20분 만에 사천면 방동리에 도착했다. 
 
강릉박씨 삼가공(三可公) 박수량(朴遂良, 1475~1546)의 재실(齋室)에 있는 무궁화나무의 높이는 4m에 이른다. 가슴높이의 둘레는 서쪽가지가 43㎝, 중앙가지가 58㎝, 동쪽가지가 48㎝이다.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5.7m, 남북 방향이 5.9m이다. 뿌리근처의 둘레는 1.46m이다.
 
35도가 넘는 폭염에도 수령 110년의 최고령 무궁화는 많은 꽃을 피웠다. 보통 무궁화나무 수령이 40~50년이다. 대일항쟁기와 6.25 한국전쟁 등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생명력이 주목됐다.
 
▲ 강릉박씨 삼가공(三可公) 박수량(朴遂良, 1475~1546)의 재실(齋室)에 있는 무궁화나무(사진=윤한주 기자)
 
몰려드는 무궁화 관광객
 
박용경 강릉박씨 삼가공파 회장(73)은 “조길자 할머니(강릉박씨 종부인, 86)가 16살에 시집와서 처음 무궁화나무를 봤는데 당시에 꽤 컸다고 전했다. 나도 무궁화나무가 이렇게 큰 것은 처음 봤다. 종친 어른들이 이 나무는 보통 무궁화나무가 아니다. 천연기념물로 등록해보자. 2009년부터 문중에서 회의했다. 그해 언론에도 보도됐다.”라고 말했다. 
 
이후 심사를 거쳐서 2011년 1월 13일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 제520호로 지정했다. 나무의 둘레가 1.46m로 현재 알려진 무궁화 중 가장 굵다. 꽃이 홍단심계(붉은 중심부에 붉은 꽃잎)로 순수 재래종의 원형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다. 
 
▲ 박용경 강릉박씨 삼가공파 회장이 무궁화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주목할 것은 무궁화가 아니라 재실 담이다.
 
“일본사람들은 무궁화나무를 다 없애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 재실 담이 높았어요. 무궁화나무가 숨어있었던 거지. 천연기념물로 등록한 후에는 바깥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담을 저렇게 낮췄어요.”
 
문화재청은 살충제도 뿌리고 3개의 기둥을 세워놓으며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박 회장은 전깃줄 철거나 주차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에서 무궁화나무를 보러 와요. 들어오는 길도 협소하지만, 차를 돌릴 곳도 없어요. 주차장을 해달라는 거지. 이 나무가 얼마나 더 살지 몰라. 그리고 전깃줄이 나무 사이로 지나가지 않습니까? 관광객들이 한마디씩 해요. 문화재청에서 견적을 뽑았는데 업자들이 계량기, 전신주 등이 필요하다며 4백만 원이 나왔어요. 전깃줄 하나 옮기는데…….(한숨)”
 
천연기념물 등재 이후 관광객은 늘었지만, 재실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다. 사전에 말하지 않고 방문하면 바깥에서만 무궁화나무를 보고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 박용경 강릉박씨 삼가공파 회장은 최고령 무궁화 나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사진=윤한주 기자)
 
“관광객이 많이 오니까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예요. 재실 관리하는 사람이 농한기에는 문을 열어줍니다. 농번기가 되면 집에 없어요. 일하러 가야지. 사정이 그래요.”
 
박 회장의 안내에 따라 재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옛날에는 타지에서 온 친척이 숙박하는 곳으로도 썼다고 한다. 
 
백성의 꽃, 광복군의 ‘표상’
 
흥미로운 것은 최고령 무궁화의 묘목으로 심은 나무가 2그루 있다. 박 회장은 3-4년 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110살의 무궁화를 할머니로 비유한다면 증손주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됐다. 무궁화 나무를 관리하는 데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92년에 최고령으로 지정받은 안동 예안향교 무궁화나무와 대비된다. 
 
의병활동의 중심이었던 예안 유림이 심은 무궁화나무는 후손의 관리 소홀로 2011년 겨울 추위에 고사됐다. 1976년 안동댐 수몰로 향교가 이전할 때 함께 이식되고 고향을 잃었다. 
 
2004년 뒤늦게 보호수를 지정했으나 경북도는 2010년 6월 수명이 다 했다는 이유로 무궁화 고사판정을 내리고 보호수 지정을 해제했다. 나무는 영하 20도의 맹추위가 보름 이상 지속됐던 2011년 겨울 얼어 죽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무궁화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당국의 무관심에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벚꽃축제는 전국 어디서나 펼쳐지는데, 최고령 무궁화 나무를 지켜주지 못하는 후손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이 부끄러울 뿐이다.
 
▲ 강릉 사천면 방동리 무궁화(사진=윤한주 기자)
 
그렇다면 무궁화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김영만 신구대학교 교수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부터 5,000년간 함께해 온 ‘민족의 꽃’이다. 신시(神市)·고조선 시대에 제를 지내는 곳 주변에 무궁화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2,500년 전에 작성된 중국 문헌에도 우리 강역에 무궁화가 많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 신시(神市)의 꽃, 무궁화를 아십니까? 바로가기 클릭) 
 
신라 897년 최치원이 작성해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 ‘근화향(槿花鄕)’으로 표기, 스스로를 ‘무궁화 나라’라고 했다. 고려시대에도 같은 명칭이 사용됐다. 이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국화를 지정한 것보다 무려 1,000년이나 앞선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 최고령 무궁화의 묘목으로 심은 나무가 2그루 강릉박씨 박수량의 재실에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특히 독립지사들이 광복정신의 표상으로 무궁화를 내세우자 일제는 탄압에 열을 올렸다.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서고, ‘부스럼 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피부에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오늘날에 무궁화가 예쁘기는 한데 진딧물 같은 벌레가 많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춘강 문화연대 회장은 “그것은 무궁화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장미가 무궁화보다 병충해가 더 많다.”라고 말했다. 
 
독립군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분노, 고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광복에 대한 희망을 담아 불렀던 군가와 시가 중 38편의 노래가사에 무궁화가 ‘무궁화’, ’무궁화 동산‘, ’무궁화 강산‘, ’무궁화 화원‘, ’근화‘, ’근화강산‘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김 교수는 “당시 독립군들이 무궁화를 널리 애창하였고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이미 독립군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증거로 보인다.”라며 “당시 언론에 게재된 무궁화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이미 임시정부나 국민들에게도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계속)
 
■ 방동리 무궁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가마골길 22-8(방동리 346)
강릉시청 문화예술과 033-640-5118/5119
 
▲ 강릉박씨 삼가공(三可公) 박수량(朴遂良, 1475~1546)의 재실(齋室)에 있는 무궁화 옆 모습(사진=윤한주 기자)

■ 삼가 박수량
 
강릉을 대표하는 12명의 학자 중에 한명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연산군 10년인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단상법(短喪法·상례 기간을 단축시키는 법)이 엄했으나 모친상을 당하자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하여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여막살이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호돈 전 강릉문화원장은 “선생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 나와 강릉 사천 바닷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세상 사람들이 쌍한정(雙閒亭)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보존돼있다”라며 “1546년(명종1년)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강원감사를 지낸 정철과 정술, 강릉부사 홍성구가 1661년에 제문을 지어 삼가당 박수량의 학문적 풍모와 덕행, 효행을 추모하며 그 뜻을 본받고자 한 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의 일면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 참고문헌

국내 최고령 무궁화, 무관심으로 말라 죽었다, 한국일보 2013년 3월 20일
[사시사철-김영만]무궁화와 우리민족 5천년, 그리고 오늘, 농민신문 2016년 8월 8일
삼가 박수량, 강원도민일보, 2003년 10월 1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릉 방동리 무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