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기록한 예맥인들
단군의 팽오가 춘천을 개간하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봄이다. 주말이면 꽃구경 하러 떠나는 사람들로 전국 고속도로는 몸살이다. 그 중에 춘천(春川)은 봄이 들어간 도시가 아닌가?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1-2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 이곳에서 맛있다는 닭갈비를 먹고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꽃잎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밑의 뿌리(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춘천에 강원도청이 자리하기 수천 년 전에 맥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나라 예국은 강릉에 있었다. 이에 대해 《세종실록 지리지》는 “강원도는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뒤에 고구려 소유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강릉은 예국의 땅이고, 춘천은 맥국의 땅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고려시대에 펴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고려말 학자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고구려와 신라, 남북옥저, 동북부여와 함께 예맥을 단군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단군조선이 멸망하자 그 유민들이 독립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다.

 
▲ 우두산 입구(사진=윤한주 기자)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
 
예맥에 관한 기록은 중국인들이 펴낸 사료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주목되는 것은 시대에 따라 장소가 달랐다는 점이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예맥은 중국의 북쪽에 있다가 《삼국지》나 《후한서》 이전 기록에는 만주가 중심이 된다. 《삼국지》나 《후한서》에 이르면 한반도 중동북 지역을 지칭한다. 이를 연구한 김용백 박사(강원대 사학, 춘천시청)는 “이와 같은 기록은 우리 민족의 일파가 중국 북부 지역으로부터 한반도 중동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맹자(孟子)는 20분의 1을 세금으로 받는 나라로 맥국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 전국시대 정치가 백규(白圭)가 자기 나라 세법을 고치는 데 5%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맹자가 매우 불쾌하게 여기면서 맥국의 세법이라고 힐난한 대화에 나온다. 
 
복기대 인하대 교수는 “맹자가 사는 곳은 철저한 조직의 통치를, 맥족이 다스리는 나라는 인화(人和)를 강조한 모습”이라며 “백규는 인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맥국의 세제를 따르려 한 것이다. 그러나 백규의 세제가 실패를 하면서 당시 중국은 매우 혼란한 시기로 돌입한다.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고 별도의 정부들이 곳곳에서 스스로 왕이라 부르며 독립국가를 세운다. 이런 상황에서 상앙(商鞅)의 주도로 민생위주의 개혁정치를 한 진(秦)나라가 곧 통일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화의 나라는 중국인들이 기록한 예국 사람들에게서도 찾을 수가 있다.
 
- 항상 성실하고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구걸하지 않는다.
- 그들의 풍속은 산천을 소중하게 여긴다. 
- 구슬이나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인다. 
- 도적이 적다. 
-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논다. 이것을 무천이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물론 중국인의 기록에서 예맥인을 미개한 민족이라고 소개한 것도 많다. 그들의 중화사관으로 본다면 다른 나라는 오랑캐(夷)일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떠한 사관으로 사료를 분석하느냐가 중요하다. 물질보다 사람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가 강원도에 있었다는 것은 가장 큰 정신적 자산이 아닐까? 이를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지 강원도민에게 묻고 싶다. 
 
▲ 우두산 가는 길목. 벚꽃나무에서 꽃잎이 눈처럼 날린다(사진=윤한주 기자)
 
우두산을 찾아서
 
그렇다면 맥국의 도시, 춘천부터 찾아본다. 먼저 우두산(牛頭山)에 가보자. 춘천시 북쪽에 있는 데 해발 134m라서 산보다 언덕에 가깝다. 우두산이란 지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택시기사에게 우두산으로 가자고 하니 눈만 깜빡거린다. 충렬탑이 있는 곳이라고 하니 그제야 알아들었다. 하긴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비치된 춘천관광안내도를 아무리 봐도 우두산은 없었다. 맥국여행이 쉽지 않겠다고 느꼈다. 
 
우두산은 입구부터 정상까지 1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이곳에 우리 군이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승전한 것을 기리며 1955년도에 충렬탑을 세웠다. 때문에 맥국시절에 하늘에 제사를 올린 제천단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어르신을 만나서 옛날에 제사를 지낸 터가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됐다. 
 
춘천시에서 펴낸 《춘추지》는 “천제단이 봉정에 있으니 이것은 옛 풍속에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남녀가 좋은 옷을 입고 높이 올라 제천하고 제단조(祭檀祖: 국조단군에게 제사)한 후에 각소(所)의 농사와 잠견(蠶絹)을 품평하며 시상(施賞) 논공(論功)하며 하루 종일 놀다 돌아가던 곳이라 지금은 사시에 놀고 즐기는 곳”이라고 밝혔다. 
 
이학주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장(문학박사)은 “일종의 개천절 축제가 열렸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기림이사금조〉에 전하는 3월에 우두촌(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망제하였다는 기록”이라며 “천제를 지냈으니 천신이 강림한 신성구역이 설정되었고 그곳에서 농사와 잠견이 함께 있으니 풍요를 나타내는 것이고 사시사철 논다는 것은 천신과 사람이 어울려 음주가무를 하며 흥겨움을 구가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우두산 안내판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산봉우리에 충렬탑을 세우면서 맥국의 역사마저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우려됐다. 산 또한 선산김씨 문중의 소유라는 비석만이 입구에 있을 뿐이다. 
 
▲ 우두산 정상엔 충렬탑이 세워져 있다. 이전에는 천제단이 있었다고 한다(사진=윤한주 기자)
 
한편 조선후기의 학자 홍만종은 《동국역대총목》에서 단군의 신하인 팽오가 춘천에 와서 산천을 개간했다고 밝혔다. 《본기》와 《통람》을 인용하며 “우수주에 팽오비가 있었다”고 하였고 김시습의 시에 “수춘은 맥국이니, 팽오가 처음으로 길을 놓았네”라는 구절이 있다. 우수주는 오늘의 춘천이고 수춘은 춘천의 별호라는 것이다.
 
이처럼 맥국의 뿌리는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그 역사를 찾는 선인(先人)들의 노력이 계속됐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가요의 주인공인 소양강처녀상은 볼 수 있어도 맥국의 뿌리를 기리는 제천행사를 만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그들의 신을 찾아서 성지(聖地)로 삼으려 했던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계속)
 

■ 참고문헌

김용백, 《춘천 맥국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년
복기대, 〈고조선기에 만들어진 한민족의 이념〉,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국학원 학술대회 2012년
이학주, 〈춘천우두산설화를 통해 본 춘천시의 정체성 연구〉, 《춘주문화28호》, 춘천문화원 2012년

■ 춘천 우두산

강원 춘천시 우두동(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