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남강유등축제에 선보인 단군왕검(사진=진주문화예술재단)

해마다 10월이면 오색찬란한 ‘유등’이 진주의 남강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보다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2010년과 2011년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된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그것이다. 진주시는 축제의 기원을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3,800여 명의 군관민으로 왜군 2만 대군을 물리친 진주대첩에서 찾는다고 밝혔다. 당시 남강에 등불을 띄어서 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전술로 사용했다. 그러나 등불은 고려의 국가의례에서 찾을 수가 있다.

고려의 제천의례, ‘연등회’

등에 불을 밝힌다고 하면 불교의 연등을 떠올린다. 실제 신라 경문왕 6년(866년)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로 행차해서 연등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이 최초로 전한다. 이러한 연등회가 국가행사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이르러서다. 흥미로운 것은 공식적인 의례는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됐지만 밤에는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는 점이다.

 
▲ 진주남강유등축제에 선보인 솟대(사진=진주문화예술재단)
 
안지원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이날 밤만큼은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야간 통행금지도 해제되어 길거리는 밤새도록 혼잡하였다”며 “왕과 군신들뿐 아니라 백성들도 밤새도록 봄날의 축제인 연등회를 즐겼다”라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궁궐에서 열린 공연을 구경하고 등불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리와 절들을 구경하면서 소원을 빌었다고 하니 오늘날 유등축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연등회가 불교 행사만이 아니라 고유의 제천의례이라는 주장도 있다. 강병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고려사(高麗史)>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셨다는 점을 근거로 “연등회도 팔관회와 거의 비슷하게 하늘의 제사를 받드는 제천행사였다”라고 말했다. 
  
사실 한국인처럼 남녀노소 불문하고 밤낮없이 노래 부르고 춤을 즐겼다는 점은 중국인들이 먼저 기록했을 정도다. 《후한서》 〈동이열전〉(後漢書 東夷列傳)과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에 상세히 나와 있다.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는 “부여에서는 12월에 고구려와 동예에서는 10월에 하늘에 감사제를 지냈는데 이를 각각 영고(迎鼓)•동맹(東盟)• 무천(舞天)이라고 하였다”라며 “이러한 풍속도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임진왜란에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진주관민과 함께 왜군과 전쟁을 치르는 모습(사진=진주문화예술재단)
 
연등행사가 석가탄신일이 아니라 정월에 열렸다는 점도 특징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정월을 등절(燈節)이라 하여 등을 밝히면서 밤을 세웠다고 밝혔다. 대보름에는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를 하면서 풍년과 흉년을 점치고 풍년을 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보면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의 연등행사가 고유의 선도문화와 습합(習合)되지 않았나 추정할 수가 있다. 
 
기독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강유등축제의 모태는 개천예술제다. 당시 부대행사로 진행한 유등놀이가 2002년 10월에 대규모 축제로 발전한 것이다. 2010년에는 250만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서 1,000여 억 원의 경제적 효과도 창출했다. 이제는 진주하면 유등축제를 떠올린 만큼 대표적인 관광 브랜드가 됐다. 
 
양정숙 진주산업대 석사는 “유등이 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긍심을 올려 준 역사적인 소재라는 사실이 시민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고취시켜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냈다”라며 “유등을 띄우는 목적이 가족과 이웃의 건강과 발전, 더 나아가 국가와 세계의 발전을 기원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호응도가 컸다”라고 평가했다.
 
유등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춤등, ▲한국의 아름다움등, ▲한국의 역사등, ▲한국의 풍습등, ▲진주성 수호등이 있다. ‘춤등’은 강강술래, 부채춤, 진주검무 등을 주제로 하고 ‘아름다움등’은 청룡, 황금잉어, 가야금 여인 등 27기가 전시된다. ‘풍습등’은 12지신, 민속놀이 등으로 구성했고 ‘수호등’은 김시민 목사, 수문장 등으로 꾸몄다. 특히 ‘역사등’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고 고구려, 신라, 백제, 후백제, 고려, 조선 등의 건국 이야기를 전시로 구성했다. 이는 유등축제가 진주를 넘어서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널리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진주남강유등축제의 전경(사진=진주문화예술재단)
 
그러나 축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초기에는 유등제작에 대한 기술적 기반이 취약했던 것. 유등축제기획단이 중국 사천성 쯔궁시를 방문해서 벤치마킹을 했다. 쯔궁시는 연등축제로 유명하다.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됐고 오늘날까지 중국 내에서 전통이 잘 보존된 곳 중의 하나다. 국내외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이곳의 기술자를 데려와서 유등을 맡겼다. 초기에는 중국의 왕실에서 제사를 올리는 천단을 만들어 일부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사라지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또한 진주시 교회와 신자들은 “진주시가 유등축제를 개최하여 무속을 조장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진주시교회연합회 부회장 김제돈(진주성남교회) 목사는 “진주시가 예산을 들여 무속을 상징하는 ‘유등’(소망등) 수만 개를 만들어 축제를 개최하고 시 전역에 지하대장군과 용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 무속신앙을 퍼뜨리고 있다”며 “미신적 요소가 가미된 이같은 행사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시가 사유지를 제공해 추진하는 논개동상 건립에 대해서도 무속신앙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로인해 진주시는 논개 동상 건립을 보류했다. 진주시 관계자는 “무속신앙 등 미신적인 요소를 전파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번 행사를 구상한 것도 아니다”고 반박했다. 진주시민들의 여론도 진주를 발전시키는 축제로 보고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 진주남강유등축제를 축하하는 폭죽(사진=진주문화예술재단)
 
앞서 고려의 연등회 또한 유등축제와 마찬가지로 반대가 있었다.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시무책에서 봄의 연등회와 겨울의 팔관회에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노역이 심하니 이를 없애어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연등회와 팔관회 자리에 환구제사와 사직제사와 같은 유교의례로 대신하였던 것이다. 당시 두 행사가 폐지된 것에 관리들의 반발과 함께 서민들의 호응도 얻지 못했다. 결국 현종이 즉위하자 연등회와 팔관회는 부활됐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를 종교적인 편견으로 반대하는 역사의 비극이 대물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외국의 종교기념일이 나라의 건국일인 개천절보다 더 주목받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주남강유등축제가 빛나는 이유이다.(계속)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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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원,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
안지원, 《고려의 불교의례와 문화-연등 팔관회와 제석도량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양정숙, 《진주남강유등축제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진주산업대학교 벤처창업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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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석, 《남강유등》, 순천대학교 사회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진주 교계 ‘남강 유등축제’ 중단 촉구〉, 국민일보, 2005년 10월 11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편찬부 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