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지난달 25일 경북 안동을 찾았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다. 이곳에 2007년에 개원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2014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됐다. 올해는 2017년 재개관을 목표로 대대적 증축에 나서고 있다. 3월 공사에 앞서 최순남 안동국학원장과 현장을 찾은 것은 이곳에 <삼일신고>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유교, 불교, 도교 이전에 우리나라 고유의 선도(仙道)사상을 5장 366자로 펴낸 《삼일신고(三一神誥)》는 환웅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승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천부경(天符經)》과 더불어 한국 선도의 철학적 체계를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문헌”이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삼일신고》는 발해석실본, 태소암본, 신사기본이 있다”라고 말했다.

 
▲ 한준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원이 독립운동가 권오설의 유품에서 나온 삼일신고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발해석실본은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나철(羅喆, 1863-1916)이 1905년 12월 30일 서대문 역전 노상에서 백봉(白峰)이 보낸 두암(頭巖) 백전옹(伯佺翁)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태소암(太素庵)본은 《태백일사(太白逸史)》에 편재되어 있다. 이맥(李陌, 1455-1528)이 천보산에 유람 갔다가 밤에 태소암에서 이명(李茗)ㆍ범장(范樟)과 함께 환단(桓檀)으로부터 전수된 진결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1949년에 간행된 《역해종경사부합편》의 《신사기》 〈교화기(敎化紀)〉에 《삼일신고》 전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을 신사기본이라고 한다. 
 
한준호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원은 자료실에서 흰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삼일신고》를 꺼냈다. 그는 독립운동가 권오설(1899~1930)의 유품에서 발견한 후손이 기탁했다고 전했다. 대중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권오설은 대표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 4월 박래원(朴來源)·민창식(閔昌植) 등과 6·10만세사건을 계획하고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됐다.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됐다. 그는 어떻게 《삼일신고》를 알게 된 것일까? 
 
▲ 권오설 독립운동가(=윤한주 기자)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삼일신고》는 당시 경성의 대종교총본사에서 김교헌이 주관하여 찍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1912년 판이니, 나철이 대종교를 1909년에 중광한 지 3년이 된다. 김교헌은 2대 교주를 역임한다. 그렇다면 대종교에서 주요 경전으로 쓰고 있는 발해석실본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연구원은 1910년대에서 1920년대 초까지 경상도 대종교인을 수록한 《본사행일기(本司行日記)》에 주목한다. 독립운동가 성세영은 경북 대종교성주시교당을 세운다. 1922년 10월 10일부터 10월 23일까지 성주에서 출발해 경성의 대종교남도본사를 방문한 내용을 적은 일기다. 이 자료에는 권오설을 비롯해 안동지역 대종교인 30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김 연구원은 “권오설은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중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해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지만 중퇴한다. 권오설이 대종교에 입교한 시기도 바로 이 시기로 추측되며, 중앙학교를 이끌던 류근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앙학교에는 대종교의 주축인물인 김두봉도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는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권오설 전시와 관련해 <철제관>을 주목해야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시신은 일경의 감시 하에 뚜껑이 용접된 철제관에 담겨 매장됐다. 이는 일경이 고문으로 참혹하게 훼손된 권오설의 시신을 숨기느라 관을 열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권술조는 아들 장례식에서 이렇게 제문을 바쳤다.
 
▲ 권오설 독립운동가의 철제관이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윤한주 기자)
 
“아, 원통하고 슬프다! 내가 너와 인간 세상에서 부자(父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33년인데…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에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독립운동가의 죽음과 유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장영주 국학원 상임고문은 “겨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丹心)처럼 권오설의 붉은 인장이 찍힌 삼일신고와 핏빛으로 검붉게 녹슬은 그 주검의 철제관은 한민족의 과거와 미래의 명암을 강렬하게 조명한다”며 “권오설의 장렬한 죽음과 아버지 권술조의 애끓는 편지에서 안동인의 뼛속 깊이 깃든 ‘효(孝)와 충(忠)’을 발견할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계속>
 
■ 참고문헌
 
김동환, 〈단군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 《선도문화》 제11집,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1년 
이승호, 《한국선도와 현대단학》, 국학자료원, 2015년
장영주,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안동정신 '삼일신고'>, 안동신문 2012년 11월 27일
〈처참했던 가일마을 권오설의 독립운동>, 매일신문 2015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