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神)을 찾기가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 절, 성당에서 외국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도 드물 것이다. 단군조선 이래로 수천 년 모신 고유의 신들을 헌신처럼 버리고 외국신을 찬양하고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전통의 신들은 미신(迷信)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됐다. 고등종교가 어디 있고 하등종교가 어디 있는가? 주인의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타자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달린 것이다. 

안동은 유교와 불교 이전에 민속신앙의 성지다. 특히 제비원은 성주신앙의 메카로 주목받고 있다. 성주신은 집을 지키는 신을 말한다. 전국의 무속인들은 “성주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받아”라고 노래한다. 물론 무가 외에도 민요나, 잡가, 대중가요 등으로 다양하게 전승됐다.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우리 민족의 건국시조인 단군이 바로 나라굿을 수행한 국무(國巫)로서 큰무당이자 정치적 제사장일 뿐 아니라 이러한 전통은 신라 남해왕 때까지 수천 년 동안 지속했다”라며 “안동제비원은 성주신앙의 메카로서 민족종교의 성지이다. 성주굿을 할 때나 안택을 할 때 부르는 성주풀이에서 안동 제비원을 성주의 본향으로 밝히고 있다”라고 말했다.
 

▲ 안동 제비원 미륵불로 불리는 이천동 석불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12.38m에 이른다.(사진=윤한주 기자)

제비원에는 성주목이 있었다

안동시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영주 방면으로 가다보면 산기슭 암벽에 큰 석상을 볼 수 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한 ‘이천동 석불상’이다. 조선시대 제비원이라는 역원(여관)이 있던 자리여서 안동에서는 흔히 제비원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몸은 높이 9.95m 너비 7.2m이다. 자연암벽을 이용해 마애불 형식으로 양각과 음각으로 새겼다. 머리는 2.43m 높이의 바위를 이용해서 조각한 다음에 몸의 목 부분 위에 얹었다. 불상의 높이는 12.38m에 이르다. 두 어깨를 다 감싼 통견의(通肩衣) 자락이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것과 오른쪽 어깨에서 뻗어 내린 옷 주름과 교차하고 있다. 또 한손은 가슴에 다른 한손은 배에 대고 있다. 발쪽 대좌 부분에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음각으로 새겼다. 대체로 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미술사적으로 파격적이고 산신 같다는 평을 내놨다.

“이 불상은 두개의 큰 바위 사이에 기도드리는 공간을 설정해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령스러운 바위를 신령스런 부처님으로 전환시킨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이 불상에는 자비롭고 원만하고 근엄한 절대자가 아니라 주술성조차 느껴지는 샤먼의 전통이 살아 있다. 어떤 때 보면 옛 제비원 주막에 계셨을 주모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느 때 보면 산신 사당을 지키는 무녀 같기도 하다. 이를 미술사적으로 풀이하면 파격적이고 도전적이며 지방적 성격을 강조한 전형적인 고려 불상인 것이다.”

그런데 석불상은 성주신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석불상이 있는 곳에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가 집을 짓는 성주목으로 쓰였다는 것. 임 교수는 “안동 제비원이 성주의 본향으로 전국적으로 노래되는 것은 미륵신앙과 나무신앙이 함께 결합되는 이 지역을 성주신앙의 성지로 인식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단군왕검의 신하

▲ 안동 제비원 미륵불로 불리는 이천동 석불상(사진=윤한주 기자)


그렇다면 성주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성주’를 “가사를 조성한다는 뜻(蓋有成造家舍之意)”으로 보아 한자어 ‘成造’를 그대로 성주의 명칭으로 보고 그 직능을 ‘집을 짓는 신’으로 해석했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민가에서는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무당을 데려다가 성조신을 맞이하여 떡과 과일을 차려 놓고 기도함으로써 집안을 편안히 하였다(人家以十月上月 激巫迎成造之神 設餠果祈禱以安宅兆)”고 하여 성주신을 ‘성조(成造)’로 기록하고 있다.

성주는 한자로 성조, 성주라고 적는데 중국 고사에 삼황오제 중 황제인 요순 씨가 최초로 집을 짓는 법을 가르쳐주어 가택신으로 좌정하였다고 하여 성주와 음이 비슷한 성조로 표기하였다. 성주풀이를 황제풀이로 명명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성조, 성주라는 신격이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고 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가 말했다. 

이에 대해 성주(성조)를 단군조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문헌이 있다.

19세기의 기록인 난곡(蘭谷)의 《무당내력(巫堂來歷)》에서 “단군 시절에 매해 시월에 무녀로 하여금 가옥을 지은 것을 축하하도록 하였는데, 그 뜻은 인민이 그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함이다. 치성 시에는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 속칭 셩쥬푸리라고 한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김교헌은 《신단실기》에서 “지금 민가에서 해마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새 곡식을 큰 시루에 쪄서 떡을 만들고 여기에 겸하여 술과 과일을 차려서 신에게 굿을 하는 것을 성조라고 한다. 이 성조라고 하는 것은 집과 나라를 이루어 만든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군이 비로소 백성들에게 거처하는 제도를 가르쳐서 궁실을 조성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반드시 단군이 내려오신 달에 신공(神功)에 보답하여 굿을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와 이맥의 《태백일사》에는 궁실을 짓는 신하로 나온다. 이를 근거로 장영주 국학원 상임고문은 “성조대군은 지금의 건설부 장관 정도의 공직관명”이라며 “우리의 민간신앙을 통해 성조신으로 숭앙되면서 부처님으로 변하여 4천년 동안 집안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온 것”이라고 말했다.

■ 참고문헌

김교헌 지음, 이민수 옮김, 《신단실기》, 한뿌리 1987년
임재해, 《안동문화와 성주신앙》, 안동시 2002년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역사문화기행》, 한국국학진흥원 2003년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 창작과비평사 1997년
장영주, 《성주풀이와 안동 그리고 국가개조》, 안동신문 2014년 6월 10일
정연학, 〈한중 가신 신앙의 비교 : 성주, 업과 재물신, 삼신, 터주와 토지신을 중심으로〉《비교민속학 35》, 비교민속학회, 2008년

■ 이천동 석불상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산2 (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