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웅녀와 관련하여 곰을 장승처럼 2개 세웠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윤한주 기자)
 
어느 마을이나 신령스러운 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동해시 동호동에 있는 신목(神木)을 주민들은 웅녀소나무라고 부른다. 수령은 300~400년으로 보고 있다. 
 
마을에 살던 한 촌로(村老)의 꿈에 웅녀(熊女)가 나타나 “내가 소나무로 환생하여 마을의 뒷산에 있으니 동호마을로 옮겨와 모셔 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아침 일찍 뒷산의 소나무를 마을의 언덕 위로 옮겨 심고 정성껏 보살폈다. 이후 매년 섣달 그믐날에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셔 천제단 제례를 봉행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실 웅녀뿐만이 아니라 단군을 모신 사람들 또한 선몽(仙夢)이 계기가 됐다. ▶ 바로가기 클릭
 
이한길 환동해학회 편집위원장(강원대학교 강사)은 “신목을 대하는 주민들의 마음가짐이 남달랐고 이로 인해 동호동이 크게 번창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라며 “천제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웅녀라는 소재가 가미되면서 마을의 신앙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신목 앞에는 대리석 제단이 3개가 있다. 크기는 가로 127㎝, 세로 84㎝, 높이 15㎝이다. 제단마다 앞쪽에 ‘천지지신(天地之神)’, ‘토지지신(土地之神)’, ‘여역지신(癘疫之神)’이란 신위명을 음각으로 새겼다.
 
천제단 기적에 놀라다!
 
천제단 역사는 마을을 개척한 엄 씨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순조(재위, 1800~1834) 때 동호천 상류에 터를 잡았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제단에 관한 주민들의 믿음이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 앞에서 기도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시의원에 당선되는 등 숱한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소문이 나 무당들도 울진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찾아왔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무당들이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밤중에 징을 치니 그 소리에 주민들이 단잠을 놓치기 일쑤였다. 천제단 주위로 울타리를 해놓고 출입을 통제했다”라고 말했다.
 
▲ 동해시 동호동 웅녀소나무이다. 앞 대리석 제단은 ‘천지지신(天地之神)’, ‘토지지신(土地之神)’, ‘여역지신(癘疫之神)’이란 신위명이 새겨져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김태수 강원대 초빙교수는 천제단 제사의 형식이나 제물의 진설(陳設) 모두 태백산 천제문화권의 전형을 따르는 것으로 분석했다.
 
“동호동 천제단이 놓여있는 방향은 정동 쪽이다. 그 방향은 삼척의 근산과 일치한다. 근산은 북평과 송정사람들이 문필봉이라 부르고 그래서 인재가 많이 난다며 신성시하는 산이다. 근산은 삼척지역의 대표적인 망제산이다. 특히 태백산에 원단이 있고 여기는 거기서 내려왔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서 태백산을 향한 망제의 가능성을 높게 한다.”
 
김도현 박사(강원대학교 강사) 또한 “태백산 천신을 할아버지신으로 인식하여 동호동 천제단에 모시는 천지신을 할머니신으로 여기는 것은 이 지역이 태백산 천제 문화권에 속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마늘까기, 줄다리기, 웅녀선발대회 등 '축제의 장'이 펼쳐져
 
▲ 왼쪽부터 웅녀사당인 웅녀정(熊女亭)과 마을주민들이 새긴 웅녀골 큰잔치 벽화(사진=윤한주 기자)
 
그렇다면 천제단과 웅녀는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마을 사람들은 천제단의 주신이 여신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환웅의 부인인 웅녀로 보고 있다. 태백산에서 왔고 제물을 수놈으로 바치며 제단 주위를 쑥으로 정화했던 전통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은 동호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주목하고 나서다. 이후 동호동 대동회를 주축으로 2006년에 무릉제에 마을고사를 ‘웅녀제’라 하여 시연해서 2등을 했다. 이듬해는 1등을 해서 2008년 강원도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
 
김태수 교수는 “동제의 신격으로 모셔질 정도라면 동호동 주변의 지명이나 설화 등에서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건져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에 신뢰도가 떨어진다. 인근 신흥동에서도 성황신을 여성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을 볼 때 별도의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마을에는 웅녀와 관련하여 곰을 장승처럼 2개 세웠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웅녀사당도 있다고 해서 확인해보니 정자(熊女亭)였다. 2009년부터 매년 ‘웅녀골 큰잔치행사’를 열고 있다. 3회까지는 웅녀영정을 필두로 거리 퍼레이드를 열었다. 
 
당시의 행사를 살펴보면 각 마을 깃발(동호동, 향로동, 발한동)을 앞세워 입장한다. 3개 마을의 깃발 뒤에는 풍물이 선다. 다음으로 마을사람, 그다음엔 제관의 행렬이 서서 입장한다. 태백산 한배검의 제례를 마쳤다는 횃불이 오르면 웅녀제단에서 제관이 “우리 웅녀 할머니 제사를 치릅시다”라고 호령한다. 제관은 웅녀제단 뒤편으로 횃불을 올린다. 풍물을 앞세우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놀이마당의 중앙으로 모인다. 이후 곰팀과 호랑이팀으로 나눠서 씨름과 힘자랑, 줄다리기 등의 행사를 연다. 또 미스코리아 대회처럼 ‘웅녀 선발대회’를 열었다. 웅녀로 선발된 처녀의 가마를 앞세워 한마당 놀이를 펼친다.
 
▲ 동해시 동호동은 매년 ‘웅녀골 큰잔치행사’를 열고 있다. 3회까지는 웅녀영정을 필두로 거리 퍼레이드를 열었다.(사진=웅녀마을)
 
문영애 동호동 축제위원회 사무국장은 “축제는 1년 동안 준비한다고 보면 된다. 행사를 앞두고 밤을 새우는 주민도 있다”라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정운영 전 동장은 “주민 1천 명이 참석하고 관광객도 1천 명 온다”라고 말했다. 
 
동호동 주민센터 맞은편에 웅녀골 벽화는 1회부터 3회까지만 되어 있다. 앞서 웅녀 거리퍼레이드와 함께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중단하게 된 것. 그럼에도 행사는 계속 열리고 있었다. 지난해 9월 19일에 열린 웅녀골 큰 잔치에는 웅녀마늘까기대회, 웅녀소원탑 풍선날리기, 웅녀주 시식회 등이 열렸다.
 
이 위원장은 “웅녀제 놀이는 고증에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지만 이를 학술적으로 더욱 연구하여 향후 동해시를 대표하는 민족놀이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취재를 마치고 중국이 옌볜조선족 자치주 왕칭(汪淸) 현 삼림공원의 한 봉우리를 신녀봉(神女峯)으로 삼고 ‘백의신녀(白衣神女)’라는 이름의 거대한 웅녀상이 떠올랐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라 중국 소수민족의 시조로 축소시키고자 세운 것이다. 그러나 국내서 그와 같은 웅녀상을 찾기는 어렵다. 마을의 축제로나마 단군의 어머니, 웅녀가 알려지고 있는 셈이다. (계속)
 
■ 참고문헌
 
김도현, 〈동해시 동호동 천제단 운영과 그 성격〉, 《박물관지 14》, 강원대 박물관, 2007년
김태수, 〈동호동 천제단 제사의 전승실태와 민속적인 의의》, 동해시 동호동, 2007년 
이한길, 《동해시 서낭제》, 동해문화원 2009년
이한길, 〈동해시 동호동 웅녀제 민속놀이 고찰〉, 동해시 동호동, 2007년
 
■ 문의
 
동해시 동호동 웅녀마을 033-530-2551~2, http://cafe.daum.net/bonm3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