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두산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사진=춘천문화원)

우두산을 찾는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이학주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장(문학박사)은  “(문화관광해설사 제보에 따르면)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둘러본다. 그런 사실은 퍽 오래되었지만 요즘에 더 늘었다고 한다”라며 “이런 바탕은 모두 우두산 설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중국과 관련해서 우두산에 청조(淸祖)의 묘라고 하는 고총(古塚)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1871년)》에 나온다. 

춘천읍에서 10리 되는 곳에 위치한 우두산에 오래된 무덤이 있다.(牛頭山有一古塚 居人指爲淸祖塚)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무덤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무덤은 중국 임금의 무덤이지요. 무덤을 파 보았더니 순전히 황토만 나왔어요. 그래 모두들 두려워서 다시 봉분을 만들어 놓으려 하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봉분이 저절로 전과 같이 솟아 나왔어요. 그 후로 소나 말이 무덤을 밟아 헤쳐 놓아도 다시 전과 같이 솟아 나오지요. 그래서 이 무덤을 솟을뫼라고 한답니다.” 내가 소양정에 올라 그 터를 바라보니 훤하게 빛나는 것이 대지임이 분명하였다. 

다음은 일제시대에 펴낸 《강원도지(1940년)》에서는 일본왕자가 부각된다.

“우두산 꼭대기에 하나의 분구(墳丘)가 있는데 세간에서 이를 소잔명존(素殘嗚尊)의 능역(陵域)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일본왕자 소슬(蕭瑟)의 무덤이라고 하는 자도 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연전에 무덤을 파서 조사해 본즉, 300년 전의 기와가 나왔을 뿐 다른 경험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는 “솟을뫼가 일본왕자의 무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솟을뫼가 일본 왕자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유포되어 있다는 증거가 된다”라며 “조선시대에 솟을뫼는 중국 임금의 무덤이었고, 일제시대에 솟을뫼는 일본 왕자의 무덤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춘천시에서 펴낸 《춘주지(1984년)》에 이르면 “솟을뫼에 묻힌 사람은 중국의 임금도 일본의 왕자도 아니다. 거기에 묻힌 사람은 자손이 없는 비둘기 부부”라고 반박했다. 이어 아들이 없는 여인이 이 무덤에 와서 몰래 정성껏 벌초하면 득남한다고 알려져 아들이 없는 부인들이 밤새 벌초하고 갔다는 설화를 실었다.

 
▲ 자용총이라고 하는 솟을뫼(오른쪽)와 조양루 철거 모습(사진=춘천문화원)
 
전 교수는 “솟을뫼가 신성성을 점차 상실했고 그 속에 묻힌 사람의 신분이 점차로 낮아진 것”이라며 “이것을 반대로 바꾸어서 시대를 역으로 올라가면 궁극에는 신(神)이 나타날 것이다. 솟을뫼는 죽은 사람을 매장한 묘가 아니다. 산꼭대기에 묘를 쓰는 경우는 없다. 영원히 살아있는 신을 모셔 놓은 신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솟을뫼를 발굴할 때 나온 것이 시체가 아니라 기와 조각인 점에 주목했다. 천신을 모신 제단으로 추론했다. 고(故)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또한 옛날 맥국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고 우두산에서 천제를 지냈을 것으로 보았다. 

이 원장은 “제천단이 있는 곳은 하늘이 부여한 최고의 땅으로 한중일 삼국의 국조신화와 관련이 있다”라며 “(그외) 풍수적으로 최고의 땅, 신비로움을 가진 땅, 염원과 미래의 땅이라는 화소를 바탕으로 우두산설화를 향유하고 있다. 이 자체만으로도 우두산은 성스러운 땅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목되는 것은 일제가 우두산에 신사를 세우려고 했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춘천시 관계자들에게 일본신사를 물어보면 대부분 춘천 봉의산을 가리켰다. 이곳에 자리한 세종호텔 춘천부지에 1918년 일제가 춘천신사를 지었다는 것. 호텔은 신사의 형태를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다. 계단과 주춧돌, 참배 전 손을 씻었던 수수사(手水舍)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경화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 국민의 역사인식부터 돌아볼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신사를 세우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국조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동생 소잔명존(素殘嗚尊)이 신라의 소시모리에 강림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른다. 소시모리를 ‘소머리’로 해석해서 우두산(牛頭山)으로 본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잔명존을 단군(檀君)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이 누나가 되고 한국은 동생이 되는 셈이다. 최초의 기록은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기 전인 1799년이었다.(계속)

■ 참고문헌

이학주, 〈춘천우두산설화를 통해 본 춘천시의 정체성 연구〉, 《춘주문화28호》, 춘천문화원 2012년
전신재, 〈춘천 우두산전설의 신화적 성격〉, 《반교어문연구 제13호》, 반교어문학회 2001년

■ 춘천 우두산


강원 춘천시 우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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