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악랄하다. 일제의 조선말살정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의 정기(精氣)를 끊는다고 말뚝을 박는가 싶더니 독립군 회의장소로 썼다고 소나무를 죽이고. 도대체 무슨 악뇌(惡腦)인지? 조선을 짓밟는 정보만 가득한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 앞은 일제가 세운 철길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선생이 1932년에 서거한 뒤의 일이었다. 1936년 서울에서 경주까지 중앙선을 놓으면서 임청각을 허물려고 했던 것. 조선의 독립의지를 끊으려고 했던 의도다. 이 집은 선생을 비롯해서 동생, 아들, 손자 등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당숙 이승화(애족장), 동생인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조카인 이운형(애족장), 이형국(애국장), 이봉희의 아들인 이광민(독립장), 친아들 이준형(애국장), 친손자 이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임청각이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등동登東 이서소而舒嘯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읊조린다)’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지었다. 《단군세기》를 펴낸 고려 말 행촌 이암(李癌)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이다. 이원의 여섯 째 아들로 영산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이 이곳 풍광에 매료되어 입향조가 되었다. 이증의 3남 이명이 중종 10년(1515)에 임청각을 지었다. 본래 99칸 규모의 대저택이었다. 그러나 일제 때 철도가 개설되면서 임청각은 강제 철거돼 현재 50여 칸만 남은 상태다. 광복 후 우리 정부가 한 일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2호로 지정한 것이 전부였다. 지난해 문화재청이 2025년까지 64억 원을 들여서 철도건설로 철거된 행랑채와 문간채, 중층의 문루를 복원하기로 했으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 임청각(사진=윤한주 기자)
 
선생은 법흥동 출신으로 을미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구국운동에 나선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난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팔 때 작성한 매매계약서와 계약증이 최근에 발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장은 고성 이씨 문중이 의뢰한 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1913년 임청각 매매와 관련한 문서라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매매금액 2천 원은 한옥 20채 가량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선생은 서간도에 정착하여 경학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인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세웠다. 주목되는 신흥무관학교 교재로 사용한 <대동역사(大東歷史)>를 1913년에 저술한 점이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그는 역사를 애국심과 국민정신의 배양수단으로 인식했다"라며 "역사는 학문적 진실 그 자체보다 국가의 체통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라고 말했다.
 
▲ 임청각의 사당이다. 그런데 조상의 위패가 없다. 석주 이상룡 일가는 독립운동을 위해 임청각을 떠나면서 위패를 모두 장주(葬主 : 땅에 묻어 장사 지냄)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던 중 평양에 들른다. 단조의 사당에서 고구려의 왕업이 서려 있는 큰 강을 보며 머지않아 태평성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만주를 다니면서 단군조선과 백두산을 노래했다. "아아! 단군 이래 오천 년 역사는 영원하며 단절이 없다는 것을 의심치 않노라"라고 노래할 정도로 선생은 국조을 자랑스러워했다. 단군을 구이(九夷)의 우두머리로 해석했고 단군의 혈통이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중국 고대 은殷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동으로 와서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학설)을 부정했다. 박 교수는 "(이를 위해) 우리나라와 중국 사료를 인용하며 기자가 도읍한 곳이 평양이 아니라 요동임을 입증했다"라며 "그는 기자동래설이 노예근성과 노예사관에서 비롯된 근거없는 황당무계한 허구라고 질타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한사군의 땅이 압록강을 넘지 못했다는 글도 남겼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사학 박사)는 “이상룡이 인용한 《수서》를 비롯해서 중국의 많은 고대 사료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하북성 일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역까지 고조선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이상룡이 개탄한 노예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상당수 사학자들은 지금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조선총독부 사관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 임청각 대청에는 독립운동가의 사진과 훈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한편 선생을 대종교 원로로 보는 주장도 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당시 입교 기록은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지만, 대종교 서도본사의 주요인물로 활동한 기록은 여러 군데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단학회(檀學會)의 회원들과 《단학회보(檀學會報)》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이 잡지는 단군정신을 통해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세워서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는데 있었다. 김 연구원은 "《단학회보》는 1919년 3월 16일 창간호가 간행되어 제8호에 그친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회보 발간의 비용을 이상룡이 보조했다는 것도 주목을 끈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독립군 단체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계속>
 
 
■ 석주 이상룡 생가
 
경상북도 안동시 임청각길 63 임청각, 찾아가는 방법(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김동환, 〈단군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 《선도문화》 제11집,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1년 
<임청각에서 보낸 하룻밤> , 내일신문 2012년 6월 26일
박걸순, 〈일제강점기 안동인의 역사저술과 역사인식〉, 《국학연구》 제2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2년 
[이덕일의 천고사설] 고조선과 레고랜드, 한국일보 2015년 1월 6일
"1913년 임청각, 거액에 팔렸다" , 경북일보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9명 배출한 임청각의 비애, 내일신문 2009년 3월 10일